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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툴리에 가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일한 소설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이다. 일기 같기도 하고 독백 같기도 한 이 소설의 서술자는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라는 긴 이름을 가진 덴마크의 몰락한 귀족 출신 시인이다. 스물여덟의 나이에 꿈에 그리던 파리에 머물게 됐지만, 고향과 달리 20세기 초 파리는 너무나 크고 공허하다. 자선병원과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며 도시 빈민의 고독과 절망을 목도한다. 비정하고 위협적인 도시의 곳곳에 빈곤과 죽음이 널려 있다.

"노트르담 드 샹 거리의 모퉁이에서 완전히 자기 몸속으로 폭삭 가라앉은 듯한 그 여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소리를 죽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는 방해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들에게 지난 일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지 모르니까. 거리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가 지루해하며 내 발밑에서 걸음을 빼앗아다가 나막신을 신은 듯이 이리저리 딸가닥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두운 도시의 골목들을 헤매고 다니던 말테는 어느 날 웅크리고 앉아 구걸하는 한 여인을 마주친다. 소리를 죽여 조심스레 지나친다. 혹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나 유난스러운 눈길이 그녀의 묻어둔 세월의 추억과 일들을 깨울지 모른다. 자신을 이리로 몰아온 그 많은 시간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아픔과 슬픔이 너무 커서 그나마 이만큼도 견디기 어렵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말테가 그랬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에는 방해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들에게 지난 일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지 모르니까."

샹제리제에도, 루브르에도 그들은 있다

 파리 여행 중 많은 노숙자를 만났지만 사진을 찍는 일은 하지 않았다. 글을 쓰며 뒤적이다 보니 루브르 근처의 화려한 야경 사진들 중 한 귀퉁이에 노숙자 모녀가 우연히 담긴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 여행 중 많은 노숙자를 만났지만 사진을 찍는 일은 하지 않았다. 글을 쓰며 뒤적이다 보니 루브르 근처의 화려한 야경 사진들 중 한 귀퉁이에 노숙자 모녀가 우연히 담긴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 김윤주

21세기 파리의 화려한 거리에서도 100년 전 그때처럼, 여전히 그렇게 후미진 자리를 차지하고 맥없이 주저앉아 있는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치게 된다. 노트르담 드 샹 거리는 물론이고 명품 매장이 즐비한 샹제리제 거리나 루브르 박물관과 팔레 루아얄 근처의 화려한 거리에서도, 오페라 가르니에 앞의 활기찬 광장에서도 그들을 발견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냄새 나는 지저분한 담요를 둘둘 말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의 텅 빈 표정을 마주치고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의 당황스러운 눈맞춤이 그들의 오랜 고요를 깨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한다. 건드리고 싶지 않은 생채기를 덮어두는 마음으로 나도 몰래 발걸음이 빨라지곤 한다. 쫓기듯 달아나는 몸과 마음이 이내 부끄러워지지만 잠시 머무는 여행객으로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루브르에서 오페라까지 이어지는 오페라 애비뉴를 걷다 보면 중간에 피라미드라는 지하철역을 하나 지난다. 그곳에서였다. 그 어린 노숙인 부부와 아이를 만난 것은. 젊은 부부는 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회색빛 담요로 온몸을 둘둘 말고 얼굴만 내민 채 앉아 있었다. 회갈색 눈동자엔 힘이 없었고 금발 머리칼은 하얀 얼굴을 더 창백해 보이게 했다.

선선한 바람이 걷기엔 딱 좋은 가을밤이었지만 밖에서 밤을 나기엔 아무래도 차가운 날씨라 걱정이 됐다. 잠든 아이를 돌보기엔 엄마도 아빠도 너무 어리고 이미 50년쯤은 살아낸 것 마냥 지쳐 보였다. 대체 어떤 사연으로 이들은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처절한 모습으로 있게 된 것일까.

행복지수 1위 덴마크에도 존재하는 문제

프랑스에서는 노숙인을 'SDF(sans domicile fixe)'라고 한다. '고정된 주거지가 없는', '주거부정자', '주거불명자'라는 뜻이다. 거주지가 확실치 않은, 안정된 주거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노숙인들은 2012년 프랑스 국립통계청(INSEE) 자료 기준으로 총 14만여 명이다. 2001년 통계에 비해 50%가량 증가한 수치다. 10년 남짓의 세월 동안 50%나 증가한 것도 문제지만 노숙인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는 점, 여성과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난민의 유입과 불법 체류자 증가로 외국인 노숙인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지역 센터나 민간 자선단체의 구호 시설 등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이들, 친지나 지인의 집에서 일시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는 이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커진다. 국립통계청의 공식 통계 자료와 자선단체의 통계 자료 사이에 몇 배씩 차이가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게다가 여러 사정으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이들까지 고려하면 그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노숙인 문제는 비단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년째 국민 행복지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로선 비현실적인 나라 덴마크에서도 노숙인 문제는 심각하다. 최근 덴마크 국립사회연구센터(SFI)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이후 젊은 노숙인이 79%나 늘어 18세부터 29세 사이 노숙인이 2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전체 노숙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역시 가족이나 친지, 친구의 집에 임시로 살고 있는 이들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므로 실제로 안정된 주거지가 없는 이들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경제가 악화되면서 실업자가 증가하고 아예 경제활동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장기 실업은 가정불화와 해체로 이어지고 이들 가정의 자녀들은 다시 거리로 내몰리게 돼 최근에는 20세 전후의 청소년 노숙인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따뜻한 가정과 부모의 온정에 굶주린 이들은 외롭고 연약한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이룬 불안정하고 어설픈 가정은 도시의 음습한 곳에 둥둥 떠나닐 수밖에 없다.

연대의식 강한 나라도 이런데...

대책 없는 빈곤과 소외가 대물림되는 것이다. 자생력이 없는 개인에게 노력만을 강요할 수는 없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 빈곤과 소외는 언제든 곪아 터질 심각한 문제로 도시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빈민구호단체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거리의 문화 예술 사업에 이들을 흡수하는가 하면, 사회적 기업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아이디어를 고안해 내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 사람들 둘 중 하나는 언제라도 자신이 노숙인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은 채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기도 하다. 자유와 낭만의 도시, 사랑과 예술의 도시 파리의 어두운 이면이다. 전통적으로 사회적·경제적 소외를 용납지 않는 연대 의식이 강한 나라인 이들 국가에서도 이러한데, 경제 불황과 빈부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것이 오랜 관습인 우리는 앞으로 어떨지 걱정이다.


#파리 여행#파리의 노숙자#릴케#말테의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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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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