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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 사는 스물 여덟 청년이고 대학에서는 인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교육감님들께서 평소 역사 교육, 누리과정, 혁신학교 등 굵직한 현안을 놓고 분투하시는 소식은 꾸준히 접합니다. 교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시는 교육감님들께 편지로나마 의견을 전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편지를 드리는 이유는 아이들이 철학 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리는 데 힘써주시길 간곡히 청하기 위함입니다.

우선은 혁신학교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입시 경쟁 하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공동체 의식과 상호 신뢰를 잃고 주체적이기보다는 순응적인 삶의 태도를 형성하게끔 부추김 당했습니다. 혁신학교는 이러한 공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에서 등장했죠. 혁신학교로 선발된 학교는 특별 예산을 지원받고 교육과정 편성에 자율권을 지닙니다. 다양한 성공 사례가 <오마이뉴스> 등에도 알려졌고(관련 연재: 행복한 학교), 현장에서 축적된 사례들이 한국 교육 혁신에 중요한 참고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2009년 설립 당시 매화고에는 인근 지역의 다른 일반고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이 주로 입학해 수준이 떨어지는 학교라고 알려졌지만, 현재 매화고는 혁신학교 지정 이후 학생들의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만족도가 높은 학교로 변했다.
2009년 설립 당시 매화고에는 인근 지역의 다른 일반고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이 주로 입학해 수준이 떨어지는 학교라고 알려졌지만, 현재 매화고는 혁신학교 지정 이후 학생들의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만족도가 높은 학교로 변했다. ⓒ 유성호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하지는 않지요. 교원 인사 발령/이동 중 혁신교육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교사가 유입, 의욕적인 교사는 유출되기도 합니다. 교사들의 업무 과중도 문제입니다. 기존 방식의 수업과 생활지도 말고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의욕적인 교사를 더 많이 확보하고 업무 부담을 효율적으로 분담할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저는 '철학 교사' 신규 임용에 정원을 꾸준히 할당하기를 제안합니다. 혁신교육의 취지는 아이들에게 상호 신뢰와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기르게 돕는 거죠. 철학 교사는 혁신교육에 누구보다도 적합한 전문가입니다. 학부 4년 내내 학생과 학생, 교수와 학생 사이에 '토론'하는 습관이 몸에 배였고 또 그 습관을 아이들이 익히도록 돕는 교수법을 습득한 사람입니다. 토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를 요구하는 교양 시민들의 고차원적 정신·언어 활동입니다.

토론 중에는 서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잠재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죠. 또한 철학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조형해낼 자신감과 힘을 북돋아 줍니다. 정의, 사랑, 행복, 진리, 인간, 사회, 인정 등과 같은 말들의 의미와 가치를 질문하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사례에 적용시켜보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낼 가능성을 활짝 열어줍니다.

또한 아이들이 무색무취의 평범한 꿈이 아니라, 자신의 독창적인 꿈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교육감님들께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독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죠. 사회의 다양성이 증진되고 시민들이 예리해지면 세뇌적이고 우민화를 유도하는 말들이 먹혀들기 힘듭니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철학을, 즉 '꿈의 가능성'을 돌려줘야 합니다.

 인문학 팟캐스트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애청자 조정환님 제공.
인문학 팟캐스트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애청자 조정환님 제공. ⓒ 지대넓얕 애청자 조정환

또한 철학 교육만큼 저비용 고효율의 혁신교육이 있을까 싶습니다. 학생과 교사, 이들이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는 교실만 있으면 됩니다. 여기에 교사가 준비한 학습자료,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해줄 시청각 자료 등이 보충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들의 주체성과 다양성을 증진시키면서도, 혁신교육이 와해되지 않도록 구심점을 갖추어야 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기본 취지에 맞게 토론 활동을 늘려야 하고, 철학 교사 신규 임용과 철학 교과 시수의 확대 편성도 따라와야 할 과제입니다. 물론 철학 교육 확대가 쉬운 일은 아니지요.

현재 '도덕·윤리 정교사'와 '철학 정교사' 두 유사과목을 담당하는 교원 자격증이 나뉘어 발급되고 있는데, 입시와 연계되는 '도덕·윤리' 과목에 신규 임용 정원을 할당하지 '철학' 과목에 할당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꾸준히 각 시·도 교육청 교원 임용 공고를 확인하지만 슬프게도 철학 교사 신규 임용에 정원을 할당하는 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육이 꼭 입시와 연계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혁신교육의 취지 자체가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탈피하는 것이니까요.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회상해 보면 쳇바퀴처럼 도는 수험 생활에서 그나마 행복했던 수업 시간은 윤리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사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윤리 시간을 통해 깨달았지요.

윤리 수업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아쉬웠던 점은 윤리는 사상가들의 관점을 소개하고 지식으로 습득하는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그런 사상을 따져보고 묻고 아이들이 자기 의견을 도출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는 않더라는 점입니다. 윤리와 철학 간의 실질적인 관계 조정과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요.

최근 5년간 철학·윤리학 계열 대학 입학정원 (자료=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
최근 5년간 철학·윤리학 계열 대학 입학정원(자료=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 ⓒ 하지율

물론 이 문제가 철학·윤리 교육 학계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만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과, 정책이 추진되고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사례가 수집되고 발전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아주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몇몇 학교에서는 '철학 교사'를 두기도 하는 걸로 압니다(가령 서울시 강남구 중동고 안광복 교사).

이런 분들의 사례들을 적극 참고해 교육감님들께서 철학 교육을 혁신 교육의 성공을 이끌 중요한 옵션 정도로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힘이 없는 한 명의 시민이며 교육 전문가도 아니기에 제가 모르는 실무적인 어려움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교육부에서 학령 인구 감소를 근거로 교원 총 정원에 제한을 가하므로 철학 교과 같은 비주류 과목에 정원을 할당하기란 여의치 않을 상황이죠.

하지만 어쨌든 교육부의 정책은 반 교육적입니다. 교육부는 '산업 수요'를 근거로 대학의 기초학문 정원의 감축을 유도해왔고, 특히 최근 5년간 철학·윤리학 계열 대학 입학정원은 위 그래프와 같이 급락했습니다. 현재는 전체 대입 정원의 100명 중 1명도 안 되는 0.36%에 그칩니다. 대학 진학률이 70% 남짓이고 중도 탈락률 등을 고려하면 훨씬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교양으로서의 '철학'을 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 없는 사회를 국가가 앞장서서 조장하고 있다는 거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삶의 대안을 찾길 원하므로 철학적인 인간이 되기를 갈구합니다. 공교육으로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사교육과 인문학 도서 시장을 향합니다. 이것만 봐도 철학이 사회 수요와 맞지 않는다는 교육부의 주장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철학의 사교육화가 인문학 전공자로서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인간을 사유하는 일의 진정한 의미는 각자도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 뜨거운 스파크를 일으키는 과정 속에서 상호 신뢰를 쌓고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대안을 창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교육감님들께서 아이들이 남의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갖게끔 철학할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시민들에게 이 문제에 관한 정보를 널리 제공해주시고 사회적 의제가 되게끔 힘써주십시오. 교육부가 이를 무슨 명분으로 가로막을지는 모르겠지만, 막는다면 기꺼이 교육감님들의 편이 되겠습니다.


#교육감#혁신학교#철학 교사#교원 임용#대학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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