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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 입구에서 옥류동천 물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맛집과 악세사리점들이 가득이다.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까지가 소위 서촌기행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장이 선다'는 옛말을 실감나게 만드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면 비록 수많은 인파에 정신없지만 우리들의 눈과 입을 한가롭게 놔두지 않는다. 하지만 뭐든지 과하면 문제가 있는 법이다. 서촌보다 먼저 관광지로 개발된 북촌 역시 이런 과도한 상업화로 인해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서촌 역시 북촌의 후유증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서촌의 비밀정원', 박노수 가옥

 박노수 화백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종로구립미술관으로 재탄생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박노수 화백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종로구립미술관으로 재탄생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 ⓒ 유영호

이런 생각 속에 조금만 걷다 보면 우측 골목길에 이곳 서촌의 또 다른 명소가 위치해 있다. 소위 '박노수 가옥'이라 불리는 '종로구립미술관'이다.

이 곳은 한동안 '서촌 비밀의 정원'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극했던 곳이다.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로 한국화의 거장 박노수 화백(1927~2013)의 집이었다. 1938년 지어진 오래된 건축물로 박노수 화백이 1972년 구입하여 살아 온 곳이다. 그러다 2011년 종로구에 기증하면서 최근 구립미술관으로 재탄생됨으로써 비로소 일반인들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 곳이다.

본래 이 집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의 백부 윤덕영이 시집간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윤덕영의 집인 벽수산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니 쉽게 말해 자기 집 바로 아래 집인 셈이다.

윤덕영은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지금의 청와대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시종원경이란 고위관료였다. 그는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가는 그 순간 침략자 일본을 대변하며 합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조카딸이자 황후였던 순정효황후는 자신의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춰두었으나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황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탈취한 장본이기도 하다. 이것이 518년 조선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한 1910년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의 모습이다.

이런 매국노 윤덕영이 합방 뒤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기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한편 이 집은 당시 화신백화점과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한국근대건축의 개척자 박길룡이 1937년 절충식 기법으로 지은 가정집이다. 한옥 건축기술에 중국인 기술자들이 참여, 한식과 서양식 절충 건축으로 탄생했는데 전반적으로 프랑스풍을 취하고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1층 위에 서까래가 보이는 지붕을 얹은 2층 구조가 이채롭다. 1층은 온돌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돼 있으며 벽난로가 3개 설치돼 있다.

벌써 약 80년 가까이 지난 오래된 집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사대문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 일반인들은 놀라게 한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이 집이 지어진 1938년이면 그 전해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백성들은 일제의 대륙침략을 위한 총알받이로, 일본군의 노리개인 '위안부'로 끌려가며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있던 시기였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비록 이런 슬픈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이지만 세월이 흘러 박노수 화백의 집이 되었고 이제는 이곳이 시민들에게 돌려져 박노수의 그림 등 여러 명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편 박노수는 해방 후 한국화 1세대 작가로서 앞서 들른 청전 이상범의 제자이기도 하다.

조선 위항문학의 정점 '송석원 시사'

 1817년,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 시사의 부탁을 받아 썼다는 글씨로 현재 종로구립미술관 뒤편 어디쯤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17년,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 시사의 부탁을 받아 썼다는 글씨로 현재 종로구립미술관 뒤편 어디쯤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문화콘텐츠닷컴 홈페이지

 정조15년(1791) 유둣날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모임을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46세의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정조15년(1791) 유둣날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모임을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46세의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 단원 김홍도 홈페이지

그리고 이곳 옥인동 일대는 18세기 이래 조선중인문화가 활발했던 서촌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송석원 시사(詩詞)가 열렸던 곳이다. 송석원(松石園)은 처음엔 개인의 당호였던 것이 어느 시점엔가 시사의 이름이 되고, 마침내 그 동네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 시사의 이름인 송석원은 이곳 박노수가옥 근처에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바위에 새겨져 있었으나 아마도 이 집을 지으며 뒤편 계단식 바위 벽 일대 토사에 파묻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중인들의 문예활동은 송석원 시사로부터 길게는 200년, 짧게는 1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송석원 시사 이후로는 구한말까지 50~60년 정도 이런 문예운동이 더 이어졌다. 통틀어 보자면 임진왜란이후 구한말까지 약 300년 가까이 지속된 문예운동이며, 그가운데 송석원 시사가 그 규모며 내용면에서 가장 컸다고 할 것이다.


#박노수가옥#종로구립미술관#서촌기행#옥류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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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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