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정신병에 따른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 내렸다.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닷새만의 일이었다. 여기에 "정확한 범행동기를 밝히기 위해" 진행했다는 심리검사에는 19일과 20일에 각각 1시간 30분과 4시간, 총 5시간 30분이 걸렸을 뿐이다.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하고 황급히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에서, 범죄의 동기를 밝히는 것 못지않게 사회적 논란 자체를 잠재우고 싶어 하는 경찰의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경찰의 의도는 발표문에 쓴 표현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경찰은 범인이 정신질환인 '조현병'을 앓던 중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전형적인' 유형의 '묻지마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번 사건은 정신병 환자 개인의 문제일 뿐이지, '여성혐오'라는 집단적, 사회적 문제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수사팀의 발표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여겼는지, 다음날에는 강신명 경찰청장이 직접 나섰다. 그는 5월 23일 기자 간담회를 자청해, 강남 살인사건을 "혐오범죄로 보기 어렵다"고 거듭 강조하며 경찰의 '묻지마 범죄' 주장에 힘을 실었다. "혐오 범죄는 의지적 요소가 있어야" 성립하지만, "실체가 없는 망상으로 인한 범행을 혐오범죄로 보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경찰 측 발표에 가장 먼저 항의한 것은 정신과 전문의들이었다. 경찰청장의 간담회가 있던 그날,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성명서를 발표해, "가해자의 충분한 정신 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의 원인을 조현병의 증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반박하며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낮은 편"이라고 밝혔다.
경찰 논리대로 '조현병 환자'여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보다 범죄율이 더 높은 '일반인'들에 대한 관리가 더 시급할지도 모르겠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찰의 '묻지마 살인' 주장
경찰의 주장은 의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범죄학 측면에서도 구멍투성이다. '묻지마 살인'이라는 표현은 공식적 범죄학 용어나 체계화된 법적 개념이 아니다. 경찰대 소속 치안정책연구소조차 2013년 논문 <묻지마범죄의 개념화에 관한 연구>에서 이 용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비판한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저질러지는 엽기적인 형태의 범죄에 대해서는 객관적 분석이나 개념정립 없이 묻지마 범죄로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문이 지적하고 있듯, 객관적 분석도, 체계적 개념정립도 안 된 용어를 쓰면서 그 앞에 '전형적 유형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는 없다. 범죄 유형이 체계화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형적 유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경찰의 발표 내용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2013년 한국보호관찰학회가 펴낸 <보호관찰> 13권 2호에 에 수록된 "묻지마 범죄자에 대한 심리학적 하위유형 연구" 또한 '묻지마 범죄'의 본질이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다고 지적하며, 대신 '무차별 범죄(random crime)'라는 용어를 쓸 것을 제안한다. 이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외국 학계의 용례를 따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폭력, 성추행, 증오범죄, 차량 강도 등,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범죄와 관련한 어떠한 관련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은 피해를 당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별다른 관계가 없으며, 범행에의 별다른 동기도 없는 경우를 지목한 것이다. 이때 '무차별'(random)이라는 의미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도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을 고려한 개념이다."흥미롭게도, 위의 정의는 '무차별 범죄' 안에 '증오범죄'를 포함시킨다. 피해자는 가해자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차별성'은 '증오범죄'의 배타개념이 아니라는 점에서, 경찰의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이기에 증오범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범주 구분의 기초를 무시한 것이다. '묻지마 범죄' (또는 더 정확히 '무차별 범죄')라고 해서 자동으로 '증오범죄'의 혐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성혐오' 논란 막으려 범인에게 면죄부 준 경찰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찰이 무리하게 '묻지마 범죄론'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범인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점이다. 형법 제10조는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별력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전혀 없는 '심신상실' 상태일 경우는 무죄를, 그런 능력이 부족한 경우는 형을 감경하게 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여성 혐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성급한 결론을 내렸고, 그로 인해 재판도 시작되기 전에 범인을 변호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경찰은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이라고 무조건 형을 줄여주지는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했다고 판단하면서 일반인과 동일한 형을 선고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법정신에도 위배된다.
10조 3항("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 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에 해당하는 상황, 즉 심신 미약 상태임이 분명하나, 범인이 스스로 그런 상태를 만든 경우가 아니라면 형의 감경은 불가피하다. 만일 그에게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상태를 배제하는 판결을 내린다면 그가 일정한 변별력을 가진 상태에서 범행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스스로 '여자가 무시해서 죽였다'고 말한 만큼, 범행 동기에서 '여성혐오'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서 '혐오'의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시도였고, 법적, 논리적으로 모순적이며,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을 끼친 무리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보여준 것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키는 '국민의 보호자'의 모습보다는, 사건이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게 온몸으로 막아서는 '정권 수호자'의 모습이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여성혐오'를 지우려고 애쓸 일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한국 여성들에게, 한국 남성들에게, 한국 사회 전체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 더 많이 토론하고, 여성혐오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더욱 안전하고 건전한 곳이 될 터이다. 경찰과 더불어 '혐오범죄가 아니라 묻지마 살인'이라는 주장을 '공유'하는 언론과 정부·여당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떻게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할까?
'묻지마 범죄'라면서 '여성상대 범죄 대책'?
경찰 발표의 모순은 후속 대책에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묻지마 살인'이라면서도 '여성 상대 강력범죄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은 것이다. 강 청장은 6월부터 8월까지 석 달 동안 '여성범죄대응 특별 치안활동'을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6월 한 달 동안 스마트폰 앱 등을 통해 '여성 범죄 취약지'나 '범죄 취약 인물'에 대한 제보도 받겠다고 했다.
물론, 여성 대상 범죄에 특별 대응하기로 한 것은 칭찬 받을 일이다. 문제는 이 '특별 대책'을 들여다 보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미봉책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진단이 허술하면 처방도 허술할 수밖에 없다.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여성 대상 범죄를 '석 달간의 특별 치안활동'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개별적 제보를 통해 '범죄 취약지'나 '범죄 취약 인물'에 대응한다는 대책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의 희생자가 '범죄 취약지'에 있었는가? 그는 그저 누구나 가는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강남은 서울에서 경찰이 가장 촘촘히 배치되어 있는 곳 중 하나다. <오마이뉴스>가 2012년 보도한 '서울시 자치구별 범죄 통계와 치안 현황'을 보면, 강남은 경찰 1인당 담당인구가 445명으로, 서울 평균인 534명보다 무려 80여 명이 적었다.
여기에 강남구는 양천구, 서초구와 더불어 가장 많은 방범 카메라(CCTV)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범행 장소에도 카메라가 있었으나, 피해자를 보호하기는 커녕 그가 실려 나가는 모습을 중계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카메라 등 많은 이 범죄를 예방하기보다 범인 검거 등 사후조치용으로 활용되는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여성 대상 범죄를 사전에 막는 예방책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예방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에 대해 비뚤어진 사회적 인식을 뜯어 고치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 자세히 쓰겠지만, '여성혐오'는 한국사회 곳곳에 배어있어 거의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많은 남성들이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여성혐오'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까닭이나 "나를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하지 말라"며 흥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수의 망상이 더 위험하다
한국의 법과 제도는 앞장서서 여성을 차별할 뿐 아니라, 여성 대상 범죄에 터무니없이 관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여성혐오를 방조하거나 적극 재생산한다. 우리는 남성이 헤어지자는 여성을 구타하거나 살해하는 남성들의 뉴스를 듣고 경악하지만, 여성에 대한 언어적 폭력과 시선의 폭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경찰은 이번 범죄가 '망상'에 의해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터무니없는 '망상'을 쌓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수가 지닌 망상이 소수 정신 질환자들의 망상보다 위험하고, 치료받지 않는 망상이 치료 중인 망상보다 위험하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여자에게 무시당해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무시당하는 사람'이 '무시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야 할 텐데, 사실은 정 반대다. 무시당하는 쪽이 죽임도 당하며,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여자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여혐'에 빠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