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로스쿨의 문제라기보다는 한양대의 문제이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한양대만의 문제를 넘어 학벌에 목매단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 아닐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그 대학 로스쿨 관계자들 TV 카메라 앞에서는 모두 머리를 조아릴 테지만, 속으로는 '재수 없이 걸렸다'며 씩씩거릴 걸요."우리 사회에서 어느 학부를 졸업했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걸 이미 내면화한 탓일까. 아이들은 놀라워하기는커녕 다들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얼마 전 한양대 로스쿨이 서류심사 단계에서 출신 학부를 5개 등급으로 나눠 최고 등급과 최하 등급 사이에 큰 격차를 두는 '출신 대학 등급제'를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마치 소 닭 보듯 했다.(관련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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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새삼스럽게 호들갑 떤다고 표현하는 아이도 있었다.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1년 365일 이른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는 것도, 부모님들이 당신들의 노후 준비도 포기한 채 사교육비에 돈을 아끼지 않는 것도 다 같은 이유 아니냐는 거다.
어떻게 해서든 당신의 자녀만큼은 '최고 등급을 부여하는' 대학에 보내려는 판에, 대체 누가 누굴 탓하느냐는 조롱이다.
사실 로스쿨까지 갈 것도 없이, 대학마다 출신 고등학교별로 등급을 정해 수시모집 입학사정 단계에서 반영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다.
설립될 때부터 특화된 입시 교육기관으로 인식된 자사고와 특목고는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겠지만, 일반계 고등학교의 경우는 재학생들 출신교를 조사하고 그들의 학업성취도와 대학생활 등을 모니터링 하여 입시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이런 소문이 돌자, 교사들 사이에서 선배들의 대학생활이 후배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이른바 '연좌제'라며 집단적인 반발이 일기도 했다.
이번에 드러난 '출신 대학 등급제'는 아이들에게조차 이러한 소문이 사실일 거라고 확신시켜 준 계기가 됐다. 공명정대를 생명으로 하는 법조인을 양성한다는 로스쿨이 저럴진대, 하물며 일반 대학에서는 오죽하겠냐는 거다.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도 그런 대학들의 꿍꿍이 아니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어차피 자사고, 특목고, 일반계고 등의 구분에다 강남과 강북, 수도권과 지방 등으로 이미 서열화한 상황에서, 반영하지 않는다고 믿는 게 외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 아이는 "자사고와 특목고가 SKY 등 명문대를 독식하는 현실에서, 어쩌면 대학 이전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때부터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중학교 2학년만 돼도 일찌감치 명문대에 갈 아이와 공부와는 담 쌓을 아이가 확연히 나뉘게 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선 한 사람의 인생이 너무나 일찍 결정되는 것 같다면서, 다른 나라도 이런지를 내게 묻기도 했다.
조만간 전국 로스쿨 서열도 정해지게 될 것이라 예측하는 아이들
외려 아이들이 놀라워하는 건 따로 있었다. 5개 등급을 나눈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정작 자기 학교를 최상위 'S등급'에 놓지 않았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한양대가 SKY나 포항공대, 과학기술원, 경찰대보다 못하다는 걸 스스로 고백한 셈인데, 그렇다면 그 로스쿨 관계자들에게 '애교심'이 없는 것 아니냐"며 키득거렸다. 이를 두고 '양심적'이라는, 두둔인지 조롱인지 헛갈리는 이야기도 나왔다.
로스쿨 관계자들도 고등학생들처럼 'SKY,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학벌 서열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라면서, 조만간 전국 로스쿨 서열도 정해지게 될 게 틀림없다고 '예측'하는 아이도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서열을 매기려는 'DNA'가 있는 것 같다면서, 이번 파문을 '서열 6위의 굴욕 사건'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한마디로 '찌질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과라면 몰라도 공학도나 과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포항공대나 과학기술원 출신을 우대하는 것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학고 학생이 사회학과를 지망하고, 외국어고 학생이 의대에 가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비유를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합격 기준을 정한 로스쿨 관계자들과는 달리, 법조인을 키우겠다면 한양대 법학과 출신이 포항공대나 과학기술원 출신보다 백배는 더 나을 거라는 게 아이들 '상식'인 셈이다.
어쨌든 아이들은 이 일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가 냄비 끓듯 분노하고 있지만, 얼마 안 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했다.
아무리 비리가 곪아터져도 그것이 학벌과 관련된 것이라면 치유되기는커녕 이상하리만큼 쉽게 묻히고 빨리 망각하게 되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온갖 사회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으면서도 수십 년 동안 학벌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는 거다.
'일찍 철든' 아이들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상식'은 그야말로 상식적이었고, 그들의 '경험'은 지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면서 교육부는 한양대를 향해 엄포를 놓겠지만,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반성하고 고치는 시늉만 할 뿐 크게 달라질 건 없으리라는 걸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한 아이는 "곧 스무 살인데, 지금껏 뉴스 등을 통해 보고 들은 게 다 그런 것들"이었다며, "그저 강산만 두 번 변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썩을 대로 썩은 나라" 너무 빨리 어른이 된 아이들요즘 들어 부쩍 교사랍시고 아이들 앞에 서기가 참으로 민망하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싶다가도, 기성세대보다도 더 빠르게 '닳아져가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이젠 "대한민국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할 지경이 돼버렸다. 아이들 사이에서 '정의'라는 단어를 들먹였다간 '진지충'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심지어 교사가 듣는 앞에서조차 '우리나라는 썩을 대로 썩었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정도다. '헬조선'이라는 말은 더 이상 청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 아이가 이번 일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본다. 이는 사실 우리 기성세대를 향한 '죽비소리'이자, 그나마 아직은 순수한 영혼에서 나온 우리 사회에 대한 '잿빛 희망 스케치'다.
"대학과 교육부에 기대할 건 없다고 봐요. 학생이기에 앞서 소비자로서 한양대 로스쿨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이는 게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출신 대학에 등급을 매겨 차별을 일삼아온 해당 대학을 상대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진학을 거부하는 거죠. 문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지방대라면 모를까, 선생님의 자녀라면 그 좋은 대학에 안 보낼 수 있으세요? 친구들이 이구동성 그래요. 그보다 몇 배 더 심한 비리가 있었다고 해도, 합격만 시켜준다면 앞 다퉈 고맙다고 큰절하게 될 거라고요. 결국 학벌과 관련된 거라면, 무조건 대학이 '갑'이고 우리가 '을'일 수밖에 없어요. 차별을 보고 순간 발끈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둔감해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