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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마다
피가 맺혔다

저도 깜냥
삶을 앓고 있나

귀 기울여보면
신음소리 끓는다

- 문효치 시 '매듭풀'

주변에서 흔히 보는 들풀. 시인은 길가에 돋아난 하찮은 풀에서 인생과 생명과 사랑을 발견한다. '매듭풀'에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인생의 굽이마다 피멍든 매듭을 짓고 있다고 본다.

한 시절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상처같은 매듭이 맺혔다고 보는 것이다. 힘겨운 일로 굵어진 노동자의 손가락 매듭처럼. 신산한 삶, 굴곡진 인생 그리고 야만의 시대를 살아온 한 인생의 굽이마다 피가 맺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효치 시인 시집 <모데미풀>
 문효치 시인 시집 <모데미풀>
ⓒ 천년의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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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풀은 바로 이 계절, 여름의 초입부터 가을까지 우리나라 어느곳이든 피는 연분홍색 풀꽃이다. 얼른 보면 줄기의 매듭마다 피멍든 것처럼 엷게 붉은 색조를 띠고 있는데 우리만의 특산식물 중 하나라고 한다. 삶을 앓고, 시대를 앓고, 세월을 앓는 시선으로 보는 매듭풀은 험난한 삶을 끈질기게 이겨내는 우리 모두의 빛나는 상처의 훈장이라고 시인은 본다.

시업 50년의 문효치 시인이 최근 야생 풀을 주제로 한 시집 <모데미풀>(천년의시작사 간행/9000원)을 펴냈다. 모데미풀 쥐오즘풀 며느리밥풀 송장풀 억새 노루오줌 뱀딸기 씀바귀 질경이 피나물 소경불알 자라풀 쇠뜨기 등 들풀만을 주제로 4부 72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우리나라 산과 들에, 도시 골목의 담벼락이나 좁은 길가에 무심한 듯 돋아난 들풀의 노래다.

누구도 외면하고 쉽게 밟고 지나치는 들풀의 끈질긴 생명력과 하찮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안고 피어난 존엄성, 열악한 환경에서도 의연한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풀들에게서 영감을 얻고, 영혼을 찾고, 세상을 앓고 있는 모든 이의 아픔을 풀의 이름으로 위로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은 이름없이 살아가면서도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 땅의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하찮은 작은 풀에서도 환경과 생명과 의지가 있다는 메시지를 발송하고 있다.

표제 시인 '모데미풀'은 전북 남원시 운봉면 지리산 자락 모데미라는 마을에서 처음 발견돼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을 향해 흰 꽃이 피는 게 특징이다.

하늘이 외로운 날엔
풀도 눈을 뜬다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하늘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만 보아도

하늘은 눈물을 그치며
웃음 짓는다

외로움보다 독한 병은 없어도
외로움보다 다스리기 쉬운 병도 없다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있는
풀은 풀이 아니다 땅의 눈이다

- 모데미풀

시인은 모데미풀과 하늘을 서로가 외로움을 달래주는 존재로 인식한다. 누구나 외롭지만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눈물을 그치며 웃음 짓는다'고 여긴다. 그런 사랑의 눈으로 보고있는 풀은 풀이 아니라 '땅의 눈'이라고 말한다. 그런 눈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외로움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백제의 역사성'(시집 무령왕의 나무새, 왕인의 수염, 백제시집 등)과 설화적 공간(시집 연기속에서, 남내리 엽서)에서 영원의 문제를 상상적 세계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등 주제의식이 강한 시를 써온 문 시인이 최근 곤충, 풀 등 작은 생명체 속에 깃든 생명의 존엄성과 신비성을 탐색해 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일견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작은 풀들은 관심의 대상도 사랑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작은 몸속에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이죠. 100층짜리 빌딩을 뚝딱 만드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 멀리 우주적 에너지에 의해 탄생된 지구 안에 하나뿐이 없는 존재이며, 그래서 인간과 동등한 신의 자식들이라는 데 인식의 끈이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집 '모데미풀'은 하늘과 외로움을 함께 느끼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삶을 공유하는 이웃의 존재"라고 본다.

음악은 풀에서 시작된다
바람 끝이 닿을 때
맺혔던 이슬이 떨어질 때
풀잎은 비올라의 현이 된다

귀를 열고 청력의 볼륨을 높이면
저 신의 음률을 들을 수 있다

신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무관심한 저 풀잎에 있다
거기서 노래를 만들고 있다

- 수크령

음악은 풀에서 시작되며, 그래서 귀를 열고 청력의 볼륨을 높이면 신의 음률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멀리 있지 않으며 우리가 무관심한 저 풀잎에 있다. 그렇게 보는 시인의 눈빛이 맑게 선연하게 다가온다.

바위 위에 서니
옛 생각이 나네

식영정 옛 정자
그 처마에서 떨어지던
투르르르 투르르르
이 밤 웬 소나긴가 했더니
어둠을 찢고 내려오는 별들 부딪는 소리
귀밝이술 아니어도
내 귀는 너무 밝아
어질어질 취한 채 흔들렸었지
이때 발아래 계곡물은
내 몸속으로 흘러들었지
이 바위에만 오면
근덩근덩 월렁월렁
옛날로 가지

- 돌단풍

'돌단풍'에서 보듯 시인은 별들 부딪히는 소리도 듣는다. '참새귀리'는 달로부터 보내오는 영감을 받아 썼다. 별들을 향해 비밀의 신호를 쏘아올리는 '개비름', 별과 성애를 나누는 '다래꽃', 기다림의 애절한 정서를 갖고 있는 '홀아비바람꽃', 신내림을 받고 있는 '바람꽃' 등등 시인의 상상력은 작은 풀들에게서 크게는 광활한 우주공간을, 작게는 섬세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뽑아오고 있다.

'개여뀌' '털여뀌' 이질풀꽃' '돌피' '술패랭이' '말똥바름' '여우콩' '쥐오줌풀' '쓴풀' '며느리밥풀' '깽깽이풀' '파드득나물' '개비름' 등 낯설고도 정감어린 풀들의 시도 있다. 하찮은 풀에도 각기 이름이 있고, 그런 풀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시인의 시선이 따뜻해 보인다.

시로 쓴 식물도감을 보는 듯한 시집 <모데미풀>은 새로운 풀꽃들의 이름과 외양을 확인하는 재미와 인생의 길을 안내하는 의미도 있다. 눈에 보일 듯이 선연하게 과거와 현실간의 따뜻한 교감들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시들은 대체로 들판의 감수성을 도시적 세계로 견인하고 있다.

시집 <모데미풀>은 궁극적으로 생명존중의 바탕 위에서 내밀한 비의를 찾아내고 모든 생명체들의 공평성과 상생의 메시지를 전한다. 생태계의 순환법칙에 따라 어느 것 하나 빠진 것 없이 소중하고, 따라서 상생의 건강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을 시로 전파하고 있는 셈이다.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 누구 하나 자신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지 않는 오늘날 작은 풀들에게 사랑을 보내고 위안을 받으라는 시집이란 점에서 관심을 끈다.

시인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한 보기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동국대 동덕여대에서 시창작 강의를 해왔으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장을 거쳐 지금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 있다. 시인은 <시가 있는 길> <시인의 기행시첩> 등 3권의 산문집도 냈다.


모데미풀

문효치 지음, 천년의시작(2016)


#문효치 새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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