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동계곡에서 발길을 돌려 내려오면 옥인제일교회가 있고 바로 그 맞은 편 언덕 위에 이중섭 화가가 마지막 살던 집이 위치해 있다(누상동 166-202).
그가 살아 있을 때는 '화단의 이채' 정도로 평가받으며 가난 속에 살았고, 결국 돈이 없어 가족을 현해탄 건너 일본 땅에 내버려 둔 채 누구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1956년 행려병자로 적십자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불운의 화가이다.
이토록 서러운 삶을 마감하고서야 '정직한 화공' 이중섭은 '우리 화단의 귀재', '요절한 천재 화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을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 했다. 해방정국의 혼란사회에서 '정직'이란 말은 어쩌면 생전에는 '가난'과 동의어이며, 사후에는 '명예'로 보상하는 이율배반의 언어이다. 어쩌면 이런 문화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현대미술관 등 곳곳에서 그의 이름 앞에 '거장'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재조명하고 있다. 본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전쟁과 분단 속에서 가난과 싸우다 외롭게 홀로 죽음을 맞이 해야만 했던 그의 삶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기러기아빠'로 살아가 행려병자로 죽은 슬픈 화가
1916년 평남 평원군에서 부농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38년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에게 매일같이 그림엽서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전달한 끝에 1945년 5월 결혼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전쟁과 가난은 그를 기러기 아빠로 만들어 놓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1950년 12월 부산으로 월남하였고 또 다시 제주도로 갔지만 1년도 못돼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1952년 이중섭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였지만 지속되는 가난은 가족들과의 동거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952년 2월 부인은 일본인 수용소를 거쳐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다시 이중섭은 부인과 자식들이 있는 일본으로 그림엽서를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것이다.
1년 뒤 그리운 가족을 못 잊어 일본으로 갔지만 밀항자의 불안한 신분을 걱정한 장모의 반대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고 1주일 만에 돌아와야 했다. 1954년 7월 이곳 누상동 친구 집에 얹혀사는 형태로 머물며 이 소식을 아내에게 편지로 알렸다.
"정은 시내 누상동에 일본식 2층 본가를 가지고 있으면서 사업상 아직 부산에 남아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상동 집의 아래 층은 집을 지켜주는 임시 입주자가 쓰고 2층의 널찍한 8조 다다미 방은 중섭의 공방이자 주거로 쓸 수 있었다."
이중섭이 이곳에 약 6개월 정도 밖에 머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그의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첫 개인전을 준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게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어렵게 미도파화랑에서 개최된 1955년 1월의 개인전은 예상치 못한 일로 그만 실패하고 만다.
디프테리아로 죽은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형상된 여러 작품들에서 어린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있다는 이유로 춘화로 낙인 찍혀 철거당했다. 그리고 그나마 전시돼 팔린 그림조차 돈을 떼이기도 하여 오히려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 기대했던 개인전은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말았다.
개인전 실패로 실의에 빠진 이중섭은 4개월 뒤 바로 대구 미국공보관에서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지만 역시 돈 버는 것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실의 벽 속에서 그만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며 여러 병원을 떠돌다 아무도 지켜 봐주는 이 없이 그가 숨진 곳은 서대문 적십자병원이었다.
하지만 시신은 무연고 처리돼 사흘간 방치되는 망자의 고독까지 느껴야만 했다. 그 후 홍제동 화장터를 거쳐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때는 1956년 9월 6일. 그의 나이 40세였다.
평론가들은 이중섭이 어려운 삶 속에서 만들어낸 뛰어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중섭을 떠올리면 '전쟁'이 떠오른다. 남북이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전쟁은 우리의 삶을 이처럼 송두리째 파멸시키는 것이다.
누상동(樓上洞)과 누하동(樓下洞)의 유래
통인시장에서 옥류동천을 기준으로 옥류동천의 남쪽이 누상동과 누하동이며 그 북쪽은 옥인동이다. 그런데 누상동과 누하동의 본래 옛지명은 누각동(樓閣洞)이었다.
이에 대하여 동국여지비고에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 누각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라고 그 유래를 알려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명칭을 새로 제정하는 과정에서 누각동의 위쪽은 누상동, 아래쪽은 누하동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수성동계곡 입구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이곳 이름이 '樓閣(누각)'이다. 분명 이 카페 주인은 이곳의 본래 지명이 누각동임을 알고 가게 이름을 누각으로 지은 듯하다.
그리고 옥인동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찾아갈 곳이지만 지명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곳에서 이야기하고 떠나도 괜찮을 듯하다. 옥인동(玉仁洞)은 본래 옛 지명인 옥류동(玉流洞)과 인왕동(仁王洞)을 합치면서 각 한 글자씩 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