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다시 카트만두까지 승합차를 타고 돌아왔다. 300km를 오는 길은 무려 9시간이나 걸렸다. 300km라고 하지만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니 다리를 놓고 터널을 뚫으면 200km도 되지 않을 거리였다. 내가 정주영씨라면 네팔에 고속도로를 깔아줄 것 같았다.
물론 기업하는 사람이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고속도로를 건설해주고 주변의 휴게소와 주유소의 이권 그리고 리조트 호텔 운영권만 얻어도 서로 윈윈하는 사업일 것이다. 그 외에도 기업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권은 많을 것이다. 네팔은 얻을 것이 많은 나라이다. 네팔은 국토를 횡단하는 고속도로가 깔리는 순간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할 것이고 아시아의 스위스가 될 것이다.
아마 뛰어난 자연경관과 천연자원, 관념적으로 청결하고 숭고한 정신과 신앙이 인프라와 결합하면 네팔은 세계에서도 몇 번째 안에 드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커다란 눈망울과 입이 귀까지 걸리는 커다란 미소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해지는 것은 물질적 풍요가 없어도 쉬운 일이다. 여기서는 초월적 가치가 현실적 가치보다 더 존중받지만 여행자의 눈에 비친 미소 뒤에 드리운 슬픔도 적지 않아 보인다. 수많은 신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 그들이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하는 신들, 사람과 신의 조화가 신비스롭다.
다음날 아침 광주 길상사의 도제스님과 진오스님 지선스님의 주도로 카트만두 시 외곽의 삿뚱갈이라는 지진피해 도시에 있는 사찰에서 천도재를 올렸다. 마을의 불교신자들과 주민들 그리고 마하이주민지원단체 대표이신 도제스님의 의료봉사단원과 희망마라톤 원정팀이 어우러져 이 지역의 희생자 25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108개의 등불을 밝히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했다.
먼저 이 사찰의 주지스님 푼와티스님의 환영사에 이은 네팔식 의식이 있었다. 푼와티스님은 비구니 스님이고 이웃 사찰에서 주지로 있는 아쇼카스님이 함께 자리를 하여주었다. 그리고 도제스님의 한국식 의식이 이어졌다. 네팔불교와 한국불교가 하나로 어우러져 희생 영령을 위로하는 모습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천도재란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불의의 객이 된 원혼을 달래주는 행위이지만 이 또한 살아남은 자, 앞으로 남은 삶을 고달프게 살아가야 하는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했다.
의식이 끝나고 우리는 준비해간 빵과 의류, 회충약과 학용품 등을 전달하였다. 선물을 전달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약간의 선물을 건네주고는 내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는 행위는 아주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삶에도 우수한 삶이라든가 열등한 삶은 없다. 지진은 가뜩이나 없는 것이 많은 네팔에서 그나마 조금 있는 것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에는 그저 황폐하기 만한 가난이 아니라 꾸밈없는 삶의 아름다움이 묻어있다. 누군가에게도 주목받아본 적이 없는 하잘 것 없는 인생일지라도 부지런히 일하고 가족이 화목하고 생을 아끼는 건강함이 있다.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산양처럼 높고 비탈진 산언덕도 마다하지 않고 터전을 잡았다. 지진피해지역에는 무너져 흐트러진 벽돌들이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치워지지 못하고 굴러다니고 있었다. 놀이터가 없는 아이들은 그 위를 뛰어다녔다. 지진은 사원이라고 해서 경건하게 피해가질 않았다. 마을 수돗가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의 표정에 체념이 묻어난다.
이제 발걸음을 돌려 나모붓다사로 향한다. 도제스님과 지선스님이 이끄는 의료봉사팀과 우리 네팔 희망마라톤 원정대가 어우러져 약 20여 명이 함께 움직이니 오랜만에 부산함에 마음이 설렌다. 나모붓다사는 카트만두에서 스와암부나트, 보우드나트와 함께 티벳불교의 3대 성지라고 한다. 600여 명의 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동자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개구쟁이의 모습으로 장난을 치는 모습이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낸다. 산꼭대기에 왕성처럼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당당하게 서있다. 카트만두에서 남동쪽으로 30여km 밖에 안 되지만 차로 두 시간을 오른다. 이곳에 오르니 히말라야의 전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주 오랜 옛날, 그러니까 부처님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이 지역을 통치한 왕에게 현명하고 자비하며 용맹스럽기까지 한 마하사티와라는 왕자가 있었다. 어느 날 왕자는 왕궁 밖을 거닐다가 병들고 허기진 어미 호랑이를 만났다. 어미 호랑이는 새끼를 낳고는 병이 들어 사냥을 못해 젖이 말라들어 새끼들도 거의 죽게 생겼다.
호랑이는 왕자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당신의 팔을 하나 잘라주면 나와 우리 새끼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왕자는 말했다. "내 팔 하나 없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 그래 내 팔을 하나 주겠다." 왕자는 칼을 뽑아 자신의 팔을 잘라 호랑이에게 주었다. 왕자의 팔 하나를 먹은 호랑이는 생기를 찾을 수는 있었지만 그것으로 새끼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호랑이는 다시 부탁을 하였다. "당신 몸을 다 주면 당신은 그 업보로 훗날 부처가 될 겁니다." 자비심이 넘치는 왕자님의 시선은 어미 옆에서 굶주려 죽어가는 일곱 마리의 새끼 호랑이를 향하고 있었다.
호랑이에게 몸을 던진 왕자가 부처님의 많은 전생 중의 하나라는 전설이다. 인간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삼라만상에 대한 무한한 자비와 보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나모붓다사 앞에는 커다란 호랑이 상이 있다. 슬픔에 잠긴 왕이 시신 위에 돌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탑 하나가 연꽃처럼 피어났으니 그것이 스투파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니 탑 뒤로 보이는 히말라야가 더욱 청정하게 보인다.
사찰을 나와 한적한 산길을 걸어본다. 저만치 염소먹이 꼴을 담아갈 망태기를 이고 가는 산골마을 처녀들의 얼굴이 히말라야 위의 하늘처럼 맑고 깨끗하다. 그 하늘에 사슴 같은 눈망울이 담겼다. 도제스님이 달려가 기념사진을 찍고 가지고 가신 우산을 그녀들에게 건네며 우산 속에서 다시 사진을 찍으시는데 추억 속의 명화 '쉘브르의 우산'의 포스터처럼 낭만적인 사진이 나왔다. 난 그 사진의 제목을 '스님과 꼴베는 소녀'로 짓고 싶었다.
다시 한참 더 내려오다가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우리의 몸은 자석에 이끌리듯이 빨려가고 있었다. 입구에 학교 창립 40주년 기념이란 표어가 붙어있었다. 어른 아이 합쳐 100여 명이 모여 있고 조그만 무대가 마련되어 앞에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백댄서들이 그 뒤에서 몸을 흔들었다. 처음 우리들은 옆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가 우리를 향한다. 느닷없이 나타난 외국인들의 어색한 몸짓에 처음에는 호기심 반 낯설음 반이었던 것이 금방 우호적인 박수와 환호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감을 얻는 나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그들의 전통 민속춤을 어색하지만 따라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나의 몸동작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리라. 한순간 바보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언제나 바보와 영웅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이 호응을 해주면 영웅이 되고 사람들이 호응을 안 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금방 진오스님을 비롯한 이리 일행이 모두 무대에 올라와 백댄서들과 어우러졌다. 우리들의 몸동작은 우스꽝스러웠지만 진지했고 열정적이었다. 열심히 하는 것만큼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다. 특히 진오스님은 그분이 오신 듯한 격렬한 몸동작으로 그날 모인 모든 사람들을 자빠뜨렸다. 어느 틈엔가 마이크마저 잡아들고 우리가 아는 렛썸삐리리를 2절까지 불렀다. 1절을 부를 때보다 2절을 부를 때의 반응은 엄청났다. 우리가 바로 한류스타였다.
잠깐 편리하게 쓰고 나면 없어지는 물질적인 보시보다 함께 웃고 슬퍼하며 마음을 주는 소통하는 보시가 최고의 보시라는 깨달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