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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표석도 설치되지 않은 채 그저 지번상으로만 존재하는 종로구 옥인동의 이여성 집터. 현재 세종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 뒤편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배화여대이다.
아무런 표석도 설치되지 않은 채 그저 지번상으로만 존재하는 종로구 옥인동의 이여성 집터. 현재 세종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그 뒤편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배화여대이다. ⓒ 유영호

자수궁 터인 군인아파트 정문을 마주 보며 서있는 세종아파트(서울 종로구 옥인동)는 해방정국 속 잘 알려지지 않은 지식인 이여성(본명 이명건)의 집이 있던 곳이다. 그의 집이 사라지고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그의 집터라는 표석도 없다. 해방정국 속에서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그의 이름은 지워졌기 때문이다.

경북 칠곡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일찍 눈을 떴고 '역사'와 '미술'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아홉 살 때 서울로 올라와 1918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그 해 친구 김원봉·김두전과 함께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이자는 결의를 하고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나기 직전 김원봉의 고모부는 이국 땅에서도 조국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들 세 명 모두에게 호를 지어줬다. 이명건은 여성(如星, 별과 같이), 김원봉은 약산(若山, 산과 같이), 김두전은 약수(若水, 물과 같이)다.

이후 이들은 한 평생 조국산천을 잊지 않고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갔으며,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들의 본명보다 그 호를 붙여 이여성, 김약산, 김약수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총독부 통계자료의 허구성을 폭로한 이여성의 역작《숫자조선연구》(좌, 총5권, 김세용 공저, 1931~1935)와 2014년 남측 출판사 '역사공간'에서 출간된 같은 책
총독부 통계자료의 허구성을 폭로한 이여성의 역작《숫자조선연구》(좌, 총5권, 김세용 공저, 1931~1935)와 2014년 남측 출판사 '역사공간'에서 출간된 같은 책 ⓒ 유영호

이여성은 1919년 3.1운동 직후 귀국하여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집안 땅문서를 팔다가 체포되어 대구교도소에 3년간 투옥되었고,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에 입학하여 김약수와 함께 그곳에서도 사회주의운동을 하였다.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일하며 총 5권에 이르는 역작, <숫자조선연구>(1931~1935)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당시 총독부 통계자료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 유물인 '식민지근대화론'이 뉴라이트세력을 중심으로 다시 고개를 드는데 이여성은 이미 80년 전 그것의 허구성을 논증한 것이다.

한편 이여성은 당시 수묵화의 거장이었던 청전 이상범과 함께 합동전시회을 열기도 했을 만큼 그에게 미술은 중요한 분야였다. 그는 1920년대 초 일본에서 조직운동을 하면서 미술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할 정도로 미술은 그를 지탱하는 힘이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이여성은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이상범은 <동아일보> 화백을 하고 있었던 터라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 때 함께 강제 해직되었다.

 이여성의 역사풍속화 가운데 현존하는 《격구도》(1930년대 작). 그림 위는 자료를 통한 고증내용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여성의 역사풍속화 가운데 현존하는 《격구도》(1930년대 작). 그림 위는 자료를 통한 고증내용을 기록하여 놓았다. ⓒ 말박물관

해직 후 이상범은 그간의 민족적 양심을 외면하고 친일행위에 앞장 섰지만 이여성은 오히려 조선역사에 대해 더욱 깊은 연구를 하여 그 흔적을 후대에 남겼다. 그는 철저한 고증을 통한 역사화에 몰두해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존하는 것은 <격구도>(1938, 말박물관 소장)뿐이다.

격구는 신라 후기부터 시작하여 고려 때 활발하게 전개된 운동인데 일제강점기 때는 이미 그 전통이 끊겼다. 이여성은 여러 자료를 통해 이를 조사하는 등 치밀한 고증을 통해 그 내용을 화폭의 상단에 기록하여 놓고, 하단에는 사실주의적인 그림으로 재현시켜 놓은 것이다.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좌, 1947)와 남쪽 출판사 '민속원'에서 2008년 출간된 같은 서적. 가운데 사진은 《조선복식고》에 수록된 사진으로 이여성의 고증에 의해 제작된 상고시대 여성의상으로 이화여전 학생에게 입혀 촬영했다고 한다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좌, 1947)와 남쪽 출판사 '민속원'에서 2008년 출간된 같은 서적. 가운데 사진은 《조선복식고》에 수록된 사진으로 이여성의 고증에 의해 제작된 상고시대 여성의상으로 이화여전 학생에게 입혀 촬영했다고 한다 ⓒ 유영호

또 이런 역사화 제작과 더불어 우리 고유의 복식사(服飾史)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의 결과물은 1940년대 초 어느 날 바로 이곳 옥인동 2층 양옥집이었던 자택 베란다에서 자신이 만든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의상을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입혀 그야말로 야외 패션쇼를 개최한 것이다.
이날 촬영된 사진들 가운데 몇 장은 해방 뒤 출간된 <조선복식고>(1947, 백양당)에 실려 우리로 하여금 당시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 후 해방정국 속에서 이여성은 줄곧 여운형과 함께 행동했고,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여운형의 뒤를 잇는다. 그래서 결국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담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했고, 회의가 끝난 뒤 북에 남은 것이다. 북에 남은 이여성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 정치인으로서의 활동뿐 아니라 김일성종합대학 역사강좌장 등 연구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하며 <조선미술사개요>(1955), <조선건축미술의 연구>(1956)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분단은 그의 이름을 남쪽에서 지워 버렸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포위된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이름을 거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그의 학문적 성과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그가 남긴 <조선복식고>에서 밝혀진 고대 우리민족의 복식문화는 당시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이고 있다.

 제헌의회 국회부의장신분으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김약수(좌)와 <조선일보>(1949.6.25) 관련 기사
제헌의회 국회부의장신분으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된 김약수(좌)와 <조선일보>(1949.6.25) 관련 기사 ⓒ 유영호

한편 이여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난 김약수(1890~1964)는 경남 부산 출신으로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에 참여했으나 박헌영이 이끌던 화요파와 결별하고 별도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제헌의원에 당선돼 국회부의장까지 됐으나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고, 전쟁 발발 때 인민군에 의해 석방돼 북을 선택했다.

당시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저지시키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친위 쿠데타였다. 친일 청산에 주도적이었던 이들은 이렇게 제거되었고, 급기야 이승만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함으로써 우리의 친일청산은 단 한 명도 이뤄지지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청산은 사회갈등 요소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암살》(2015, 케이퍼필름)에 나온 의혈단장, 약산 김원봉
영화《암살》(2015, 케이퍼필름)에 나온 의혈단장, 약산 김원봉 ⓒ 유영호

한편 최근 영화 <암살>(2015)에 본명 김원봉으로 출연하면서 관심을 끈 김약산(1898~1958)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영화 속 역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관되게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다. 의열단 단장과 조선의용대 총대장 등을 역임했으며, 해방직전 임시정부에서는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이토록 조국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일제와 싸우면서도 체포되지 않았던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친일파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온갖 수모를 겪었다. 이후 그는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해 그곳에 머물러 북의 초대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역임했다.

결국 1918년 더 많은 공부를 위해 중국으로 떠나며 조국을 잊지 말자고 이름까지 고쳐가며 결의했던 이들 셋은 모두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며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담에 함께 참가했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여성#서촌기행#김약수#김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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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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