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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무영객은 봉래산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자신보다 열 살쯤 아래로 보이는 청년이 검무를 추고 있었다. 검기(劍氣)는 사납되 검망(劍鋩)은 고르지 못했다. 틈이 보였다. 공격만 생각했지 수세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검세(劍勢)다. 노인이 강조하는 수련법이 아니다. 아니면 노인의 가르침이 변했거나. 청년이 검무를 끝내고는 이어 이름 모를 초식을 연마하고 있다. 무영객은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초식을 연습하는 걸 보니 노인과 유파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노인은 결코 초식 따위를 가르치지 않는다. 초식은 변화를 억제한다. 검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선 초식이 최고이지만 검이 살아있기 위해선 변화가 최선이다. 초식에 매이지 말라. 노인의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은 초식을 연습하고 있다.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모옥 안에 있을까, 아니면 산중에 약초를 캐러 갔을까. 그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기습을 할까 하다가 정면승부를 하기로 했다. 그가 청년 앞에 다가섰다. 청년은 검미가 치솟은 강인한 인상이다. 그가 조용히 장검을 뽑았다. 청년도 그의 기세를 눈치 챘는지 연습하던 검을 눈앞에 겨루고 대결 자세를 취했다. 청년의 숨소리가 생각보다 고르다. 음, 이건 노인의 영향이군.

그는 하단세로 청년의 공격을 기다렸다. 아까 검무를 추고 초식을 연마하는 것으로 보아, 청년은 그와의 대결에서 스스로의 기(氣)를 제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나, 둘, 셋, 넷, 청년이 그의 주위를 돌았다. 그는 가만히 청년을 향해 돌아섰다. 다시 하나, 둘, 셋, 네엣, 하는 찰나 청년이 들어왔다.

쉬익, 채앵, 첫 번째 소리는 검이 허공을 스치는 소리였고 두 번째는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소리 아닌 신음. 크윽, 목울대에서 나는 것이 아닌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청년의 공격은 훌륭했다. 그는 첫 번째 검초를 피함과 동시에 허공에서 반바퀴 돌아 휘두르는 일초에 청년이 당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청년은 그 검을 막아냈다. 청년은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지만 적의 공격을 막아냈으니 다시 원자세로 들어가려고 한 발 물러섰다. 그 순간 따라 들어간 그의 검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전에서는 나아감보다는 물러섬이 중요하다는 노인의 가르침이 아직 배어들지 못한 모양이다. 청년은 와르르 쏟아지는 창자를 어이없이 바라보며 무릎을 꿇더니 이내 엎어졌다. 

그는 엎어진 청년을 바라보며 봉분 위에 놓인 당혜를 생각했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노인이 모옥의 대청 앞에 서 있다. 노인은 약초를 캐러 가지 않고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노인은 아무 말이 없다. 그가 왜 찾아왔는지를 알 것이다. 변명이 필요 없다. 노인은 노인의 방식대로 규칙을 적용했을 뿐이고 그는 그의 방식대로 대응하면 그 뿐이다.

그는 노인을 향해 제미살세(齊眉殺勢)로 겨누었다. 노인은 말없이 섬돌을 내려와 청년이 쓰러진 곳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왔다. 그는 공격을 해야 했다. 지금이야,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공격을 하지 못했다. 노인의 발걸음은 묘하게도 그의 호흡을 흩트려 놓았다. 조용히 천천히 내딛는 노인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의 가슴에 쿵쿵 울렸다. 노인은 이윽고 쓰러진 청년의 손에서 검을 빼냈다.

그와 노인은 말없이 대치했다. 노인은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다. 유람 나온 노인네가 산천경개를 구경나온 듯하다. 반면에 그는 제미살세에서 섬검퇴좌(閃劍退坐)로 바꿨다. 뒷무릎을 구부리고 칼끝을 위로 하고는 검을 등에 대었다. 변화는 무궁하되, 변용(變用)은 유한하다고 노인이 얘기했다. 실체 없는 변화만 좇다가 실질적인 변용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가 지금 취한 것은 실전에서의 변용이 불가능한 것 아닌가 싶을 자세다.

예전 같았으면 노인이 호되게 나무라야 할 자세다. 그와 노인의 호흡이 서로 섞였다. 노인의 호흡은 그의 호흡보다 가늘고 길었다. 특히 노인의 날숨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런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날숨 사이에 일정한 박자가 있다. 서로 대치한 지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지났다. 바람이 한 차례 휑하고 불었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낙엽 하나가 제풀에 못 이겨 허공에서 내려앉는다. 잠시 후 감나무 가지 끝에 앉은 까치 한 마리가 끄억, 끄억 하며 갈 길 바쁜데 붙잡아 놓는다고 불평한다. 

틈을 찾을 수가 없다. 무영객은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아찔했다. 노인의 눈을 바라봐선 안 되었다. 차앗, 그의 입에서 일성이 터져나왔다. 내줘야 해. 노인의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선 나도 하나를 주어야 해. 그는 뇌까리며 검을 비스듬히 후려내며 땅바닥을 한바퀴 굴렀다. 그리고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는 팔을 쭉 뻗었다. 그 일격에 노인이 당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대여섯 번 검의 교환이 있어야 했다.

노인은 배와 가슴에 칼을 맞고도 정신을 잃지 않은 듯 검을 지탱하고 서 있다. 그의 오른쪽 구레나룻에선 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천천히 기어내려 왔다. 잠시 후 지렁이는 붉은 실뱀으로 변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노인은 그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므렸다. 그는 노인을 안아 모옥의 기둥에 기댔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제자를 거둔 적이 없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모두 나의 이용 대상였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평생 나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여섯이었는데 그중 다섯째인 너와 넷째가 가장 강했다. 첫째에서 셋째까진 일을 하다가 고혼(孤魂)이 되었고, 넷째는 일을 보냈더니 행방불명이 되었다.

다섯째인 너도 자칫하면 넷째처럼 못 찾을 뻔했지. 알다시피 여섯째는 아직 배우는 과정였다. 네 상대는 안 되었다. 너의 가장 큰 호적수는 아마 넷째가 될 것이다. 혹시 강호에서 넷째를 만나거든 이 북명노야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너희들을 살수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만을 전해다오. 자, 이제 끝내자. 나도 내려놓고 싶구나." 

노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빨리 끝내라는 요청이다. 무영객은 검을 들고 노인 앞에서 무연히 서 있었다. 과연 이 자는 나의 은인인가, 원수인가. 나의 스승인가, 적인가. 노인이 갑자기 눈을 떴다.

"너를 대비해서 이 애에게 가르친 것인데… 아직 익히지 못했더구나. 마지막 가르침이니 새겨 두어라…."

그제서야 무영객은 오른쪽 구레나룻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뱀의 실체를 깨달았다. 구레나룻에서 목을 지나 가슴까지 일정한 깊이의 길이 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이 마지막에 검을 거두었구나. 좀 더 깊이 벨 수도 있었을 텐데.

무영객은 마지막 예의는 갖추기로 하고 검을 치켜세운 다음 노인을 사선으로 벴다. 깊고 빠르게….

그는 노인이 자신에게 시전한 마지막 수를 내내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봉래산을 빠져나왔다. 그날따라 적운봉의 정상엔 구름이 걷혀 있었다.

무영객은 협곡의 능선을 가로질러 구사곡을 벗어났다. 계곡의 요충지에는 보나마나 금의위나 은화사 나부랭이들이 매복해 있을 것이다.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봐 그는 계곡의 팔부 능선까지 올라 우회했다.

어서 빨리 자운헌에 가야 한다. 일단 조복에게 맡기긴 했지만 타인의 손에 맡긴다는 건 영 개운치 않다. 어제는 계곡의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약초를 찾아 상처에 덧댔다. 한결 나아졌다. 피부는 아물어가고 상처는 곪지 않았다. 며칠 더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그때 가서 편안하게 치료하는 것이 오히려 빨리 낫는 길이다.

노인이 봤으면 잔소리 꽤나 했겠구먼. 그까짓 오장 높이 낭떠러지에서 경공을 실수하다니. 거기에 마차를 기습하는 방법도 잘못 됐어. 기습은 상대의 시야에 갑자기 나타나야 해.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표를 찌르는 것이 기습이지. 그래야 기선을 제압할 수 있어. 기선을 제압하면 팔 할이 성공한 거야. 명심해, 기습은 의표를 찔러 기선을 제압하는 게 관건이야. 이번에 너는 지나치게 안이했어. 아무리 자신 있었다 할지라도 그런 식으로 표적에게 노출 되면서까지 추격해선 안 되는 거였어.

기습은 공격하는 자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이루어져야 해, 미리 노출이 되면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게 되지. 생각할 여지를 주면 상대는 반드시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세우게 돼 있어. 그렇게 되면 살수의 의도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게 돼. 언젠가 노인이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세 번째 암습에 성공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노인이 자신의 행적을 꼬치꼬치 캐묻더니, 끝에 가서 해준 말이었다. 노인의 말이 맞았어. 내가 방심했어. 좀더 기다려서 암습으로 끝냈어야 했어.

구사곡이 끝나는 곳에 깊고 울울한 숲이 이어졌다. 이제 능선은 숲을 향해 내리막길이 되었다. 그 숲을 너머로 우뚝한 봉우리가 보였다. 저곳이 반야봉인가?

갑자기 기척이 느껴졌다. 아차, 조심해야 했어. 생각에 잠기느라 산비탈과 길이 만나는 지점까지 간 걸 잊었다. 무영객은 살짝 엎드리고 전방을 주시했다.

"누구냣!"

컬컬한 목소리가 잡목 너머에서 들렸다. 무영객은 납작 엎드리며 정황을 살폈다.

"나와랏! 너는 이미 들켰다."

좀전보다 젊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숲을 찢었다.

무영객은 움직이지 않았다. 들켰다는 건 인정하더라도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지 않고 나가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요일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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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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