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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노동의 끝 집으로 향하는 어버지의 발길
▲ 고된 노동의 끝 집으로 향하는 어버지의 발길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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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남편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월급은 모두 아내 통장으로 넘어가고 별도로 받는 수당 중에 일부를 용돈으로 쓴다. 이걸 개미처럼 아껴 사막에 가는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니 웬만한 자린고비 짓도 마다치 않는다. 옷이나 신발은 출정에 필요한 것 외에는 거의 사지 않는다. 기분 내키는 대로 뭔가를 사들이는 건 꿈도 꿀 수 없다. 그래도 나는 크게 불만이 없다. 비록 일면은 궁박해도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1월, 인도 남서부 케랄라 깊숙한 곳 뮤나에서 펼쳐진 'The Ultra INDIA Race 2012' 대회도 마찬가지다. 각국에서 모여든 선수들 틈에 끼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로를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그간 용돈을 아껴 경비를 마련하고, 직장 상사 눈치를 살피며 휴가를 얻었지만, 연일 계속된 송년 모임과 겨울 한파로 운동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경기가 설 연휴에 껴서 간신히 아내의 재가를 받았지만, 호화로운 관광도 넉넉한 유람도 아니다. 오로지 극한을 쫓아 터진 발바닥 물집의 고통을 씹으며 달리고 또 달리는 여정이다.

선수들의 환호로 시작된 인디아 레이스
▲ 선수들의 환호로 시작된 인디아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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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에도 태양이 이글거리지만 사막의 건조한 대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체내의 수분이 몽땅 빠져나갈 기세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오듯 뿜어져 나왔다. 연신 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가시질 않아 계속해서 물 조절에 실패했다.

벌레 떼가 머리카락 속까지 헤집고 다녀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둘러보니 나뿐 아니라 모두 비슷한 몰골들이었다. 원주민들은 일그러진 얼굴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마을을 지나가는 선수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마 그들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4박5일 220km 레이스의 시작 인도 남서부 케랄라에서
▲ 4박5일 220km 레이스의 시작 인도 남서부 케랄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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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한 가족 생활수준은 낮아도 교육열은 가장 높다
▲ 단란한 가족 생활수준은 낮아도 교육열은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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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무탈하고 안락한 시절은 인왕초등학교 3학년 때로 일찌감치 막을 내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 중 하나였던 삼양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주식은 수제비가 되었지만 5형제 중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기당한 돈을 받기 위해 집에서 과천까지 몇 번이나 발품을 팔았다. 아침에는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집을 나섰지만 저녁이 되면 풀이 죽어 퉁퉁 부은 발을 절룩거리며 돌아왔다. 나이가 든 후 되돌아보니 당시 아버지가 너무나 순진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살면서 사기당한 돈을 순순히 돌려받았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인도 선수를 격려하는 대회 운영자 제롬
▲ 인도 선수를 격려하는 대회 운영자 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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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녹차밭이 있는 뮤나를 달리는 선수들
▲ 세계 최대의 녹차밭이 있는 뮤나를 달리는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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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자발적 공산주의가 수립된  인도 케랄라주
▲ 세계 최초로 자발적 공산주의가 수립된 인도 케랄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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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에서 CP까지 남은 거리를 잘못 체크하면 물 부족으로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전날(40km), 독일 선수 Brigid가 그랬듯이 레이스 셋째 날(38km) 내가 CP1을 2km 정도 앞두고 물이 거의 바닥이 났다. 물통에는 한 모금 정도만 남았다.

2005년 고비사막에서는 조금 남은 물을 시각장애인에게 먹이고 나는 목에 두른 버프에 밴 물기를 입술로 빨며 사막 한가운데서 4시간을 버틴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때보다 녹록하다고 속단할 수 없었다. 땀 배출과 갈증을 줄이기 위해 속력을 줄였다. 오전 10시 35분, 간신히 물통 뚜껑 정도의 물을 남겨놓고 15km 지점 CP1에 도착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세계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뮤나의 녹차밭
▲ 세계 가장 높은 곳에 조성된 뮤나의 녹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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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목한 목재의 이송수단으로 사용되는 코끼리
▲ 벌목한 목재의 이송수단으로 사용되는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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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청춘 시절, 기울어진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난생 처음 오방떡 장사를 시작했다. 기왕에 시작한 사업인 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오방떡을 만들고 싶었다. 장사 시작 전에 서울 명동에서부터 동대문까지 걸으며 시장조사를 했다. 특별한 맛이나 향이 나는 오방떡이 있으면 주인에게 비결을 꼬치꼬치 물으며 비법을 꼼꼼히 메모했다.

그러고 나서 10만 원의 자본금으로 오방떡 주물과 손수레, 반죽에 필요한 재료와 파라솔을 샀다. 수십 번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오방떡 반죽이 세상에 나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요즘 말로 대박이 난 것이다. 내가 만든 오방떡을 먹고 맛있어 하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얼마 후 소집영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할머니 허락을 받고 밀림을 달리다 멈춰서 “찰칵”
▲ 할머니 허락을 받고 밀림을 달리다 멈춰서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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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엄지발가락의 수난 그래도 선수는 달려야 한다
▲ 죽은 엄지발가락의 수난 그래도 선수는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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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나는 그 시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인도 뮤나의 밀림 한복판에 서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제껏 변변한 꿈 하나 이루지 못했다. 바닥까지 떨어지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목표로 했던 걸 이루기보단 목표 주변에 떨어진 낱알을 주우며 만족해했다.

화가의 꿈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고, 검정고시도 과락의 쓴맛을 봤다. 피 끓는 청춘의 대부분을 허비하다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남들보다 6년이나 늦었다. 국정원에 들어가려던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 설 때마다 좌절과 실패가 있었다.

나는 대한국민이다 인도 케랄라주 뮤나에서
▲ 나는 대한국민이다 인도 케랄라주 뮤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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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순간을 위해  4박5일 동안 220km를 달렸나보다
▲ 이 한 순간을 위해 4박5일 동안 220km를 달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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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고교생들의 완주 축하 공연
▲ 현지 고교생들의 완주 축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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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순탄하게만 이어지는 삶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좌절과 실패의 경험을 불행한 인생과 동일시한다. '꿈을 이룬 사람은 행복하고 좌절한 사람은 불행하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설정해놓고 모두 거기 빠져 허우적거리며 산다.

과연 그게 맞는 걸까? 인도 뮤나의 밀림 한가운데 서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꿈을 이뤄야만 행복한가? 좌절을 겪으면 불행한가?' 나는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좌절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한가?'

그런데 나는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행복하기까지 하다. 누구든 올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뮤나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밀림을 달리며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나는 과거 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우리가 한평생 가장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한 삶이 아니다.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아니며, 좌절하지 않는 삶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 때문에 행복했다거나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삶이다. 누구 때문에 행복했다거나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삶이다. 그럴 때 그 인생은 너무도 잘 산 인생이다.


#사막#오지#인디아 레이스#김경수#직장인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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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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