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앞에는 '심플리'라는 이름의 잡화점이 있었다. 낮 동안 회의나 인터뷰, 수업 참관 등 예정된 일정을 마치고 나면 늘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심플리에 들러 싸구려 와인이나 맥주 한 캔을 군것질거리와 사들고 호텔로 들어오곤 했다. 호텔 근처에는 파리의 여느 거리와 다름없이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매일 밤 분위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몽파르나스역에서 호텔까지 오는 길에는 건장한 남자 서너 명이면 꽉 찰만큼 아주 작은 가게가 서너 개 늘어서 있었다. 포장마차가 조금 진화한 수준 같기도 한 이 작은 가게들은 간단한 요깃거리들을 팔고 있었다. 샌드위치나 크레페 가게도 있었고, 햄버거와 치킨 따위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케밥과 푸짐한 감자튀김도 맛나 보였다.
다진 치킨 요리와 감자튀김과 야채 샐러드를 골라 담은 도시락 하나가 7유로쯤 해서 출출한 밤 야식으로는 딱이었다. 심플리에서 사 온 맥주나 와인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운 게 없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 와서까지 이렇게 끼니를 '때워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여행자의 가난은 때론 낭만일 수 있다. 게다가 암호 해독하듯 프랑스어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일이 늘 그렇게 즐거운 것도 아니다. 온종일 낯선 곳을 헤매고 다니다 숙소에 들어온 밤이면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이 그립기 나름이다.
가을이 제법 깊어지니 아침저녁 공기가 부쩍 쌀쌀해졌다. 마침 호텔 근처에 늦게까지 문을 여는 베트남 식당이 하나 있어 뜨끈한 국물이 그리운 밤에는 톡톡히 덕을 보았다. 파리에는 베트남 음식점들이 유난히 많다. 심지어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파리 13구에는 중국 식당보다도 베트남 쌀국수집이 더 많아 보인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70년 긴 세월을 베트남은 프랑스 통치하에 있었다. 식민지 이민사의 서글픈 역사와 고달픈 이방인들의 삶의 애환을 오래도록 담아낸 음식이라 그럴까, 파리의 베트남 식당에서 먹는 쌀국수와 만두는 서울의 그것들보다 훨씬 깊고 투박한 맛이 난다.
루브르와 오페라 근처 골목에는 일본 음식점이 많았다. 주로 우동이나 초밥을 파는 가게들이다. 말쑥한 파리지앵 젊은이들이 가게 문 앞에 줄지어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싶으면 여지없이 일본 식당이다. 한국 식당도 종종 보였지만 가게에 내걸어 놓은 메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본 식당과 한국 식당의 중간쯤 되어 보였다. 그래도 한국 식료품점이 있어 반가웠다. 가게를 처음 발견한 날은 김밥 한 줄과 컵라면 두어 개를 사 들고는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처음 마신 에스프레소, 카페 드 플로르에서 먹은 야채 수프와 오믈렛, 베르사유의 레스토랑에서 큰맘 먹고 주문한 연어 요리와 와인과 클럽 샌드위치는 이 여행을 기념하며 오래도록 기억할 맛들이지만, 20년 만에 다시 찾은 파리의 첫날 아침, 한입 베어 문 크루아상의 그 촉촉함과 고소함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20년 전 파리 여행이 단단하고 투박한 껍질 속에 감춰진, 순해서 질리지 않는 바게트 맛이었다면, 이번에 다시 찾은 파리는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속살을 부서질 듯 얇고 바삭한 표면이 감싸고 있는, 좀 더 오래 입 안 가득 풍미가 머무르는 크루아상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죽기 전에 파리에서 꼭 먹어 봐야 할 것들' 목록에 있는 요리를 다 먹어 보진 않았지만, '먹어 보지 않으면 후회할 파리의 빵들'은 다 먹어 봤지 싶다. 안 그래도 빵이며 떡을 좋아하는데다 파리는 한 집 건너 빵집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호텔 카페테리아의 메뉴에는 늘 다양한 빵들이 올라와 매일 아침을 행복하게 했다.
바게트(Baguette), 크루아상(Croissant), 브리오슈(Brioche), 에스카르고 레쟁(Escargot Raisins), 팽 오 쇼콜라(Pain au Chocolat), 쇼송 오 폼므(Chausson aux Pommes), 팽 드 캉파뉴(Pain de Campagne)... 어떤 이름은 낯익고 어떤 이름은 낯설었지만, 그 옛날 어린이 만화영화에 나오던 그림을 똑 닮은 폭신한 모양의 빵들이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즐거웠다.
하나하나 빵에 얽힌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전통 바게트는 길이가 55cm 정도이며 표면의 칼집은 빵을 만든 이의 사인을 의미한다든가, 프랑스어로 '초승달'을 의미하는 크루아상은 실은 헝가리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루이 16세의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의해 프랑스로 전해지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렇다. 또 '에스카르고'는 불어로 '달팽이'를 의미하니 에스카르고 레쟁은 이름 그대로 '건포도(raisins)가 들어 있는 달팽이(escargot) 모양의 빵'이다.
브리오슈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는데 사치와 낭비로 유명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저작권이 돌아가 버린 그 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프랑스대혁명 당시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던졌다는 이 철없는 말 속의 '케이크'가 실은 '브리오슈'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버터와 설탕과 달걀이 많이 들어가는 빵이라 당시엔 귀족들이나 먹을 수 있는 빵이었던 것이다.
"파리에서는 충분히 먹지 못하면 몹시 허기가 진다. 빵집 진열대에는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그득하고 거리에는 테라스에 차려진 식탁에서 식사하는 사람이 많아서 늘 먹을 것이 눈에 보이고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특파원 일을 그만두고 나서 미국에서 아무도 사주지 않는 글만 쓰고 있을 무렵, 누군가와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집에 말하고 나왔을 때 가기에 딱 좋은 장소는 뤽상부르 공원이었다." 파리 체류 시절, 젊고 가난하고 가진 거라곤 소설을 쓰겠다는 꿈뿐이었던 헤밍웨이는 아내 해들리에게 점심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뤽상부르 공원에 나가 두어 시간씩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곤 했다. 일부러 식당이나 빵집이 없는 골목길을 골라 다니지만, '노르스름하고 맛있는 빵 껍질의 맛이 생생하게' 떠올라 괴로워하기도 한다.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건강한 체구를 타고난 나는 끼니를 거르면 몹시 허기가 졌다. 하지만 배고픔은 나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해 주었다. 나중에 보니 내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식욕이 강하거나, 미식가이거나, 혹은 식탐이 있거나,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헤밍웨이가 미식가였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의 소설이나 에세이에 그렇게 자주 음식과 와인과 식당과 카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파리에서 작가의 삶을 처음 시작한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가난하고 굶주렸던 젊은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