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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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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장>

소림사는 장문인이 새로이 추대되면 흥법회를 여는 전통이 있다. 장문인의 임기가 딱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대개 3년에서 5년 사이이니 흥법회도 그 간격으로 개최되곤 했다. 흥법회는 평소엔 수행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소림이 새로운 장문인의 임직을 축하는 의미로 산문을 개방하고 사부대중에게 법(法)을 설(說)하는 행사이다. 대중 설법은 장문인 뿐만 아니라 원로스님도 참여하고 한편에선 젊은 무승들의 무술 시연도 있다.

흥법회는 신임 장문인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는데, 대중 교화에 무게를 두는 장문인이 있는가 하면, 선찰(禪刹)의 격을 높이기 선객을 초빙하여 강원을 열기도 하고, 때로는 관리와 지역 향신 그리고 무림인을 초청하여 소림의 세를 과시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흥법회는 소림 승려들에겐 신임 장문인의 사찰 운영 방식과 그 방향을 짐작하게 하고, 무림에선 초청인사들의 면면으로 강호의 일에 얼마나 관여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계기가 된다.

사하촌(寺下村)은 본래 소림의 장토(莊土)를 경작하는 소작인으로 형성된 촌락이지만, 사찰의 규모가 규모이니 만큼 내왕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연스레 장시(場市)가 형성되었다. 네거리 대로에는 객주와 여각과 점포 등 오십여 호가 좌우로 펼쳐져 있어 평소에도 웬만한 시골의 장터 이상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사하촌은 산문과 시오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흥법회가 열리는 기간이 되면 인근 낙양은 물론 장안의 장사치들까지 모여들어 산문 앞까지 난전이 펼쳐진다.

소림의 법회에 초대되거나 참석하려고 사방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넘쳐나 난전은 마치 명절을 앞둔 시장바닥처럼 북적거렸다. 소림의 흥법회는 무림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초대를 받은 문파의 중진은 물론 소림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긴 소장파들도 덩달아 따라오니 소림은 늘 예상보다 많은 인원을 맞이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다. 대중들 또한 평소에 접할 수 없는 사찰을 구경하고 소림의 명성에 걸맞는 무예를 확인하고 싶어 바람에 흥법회는 축제처럼 흥청댔고 장터처럼 북적였다.

흥법회 첫날, 일주문 앞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소림사 장문인의 첫날 법회가 대중방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사실 대중들은 고리타분한 법회보다는 사찰 구경에 더 흥미를 느껴 사시(巳時)에 시작하는 법회는 나 몰라라 하고, 법문이 끝나는 오시(午時) 경 더욱 몰려드니 산문 입구는 저자거리가 따로 없었다.

첫날이라 그런지 사하촌 네거리에서부터 각종 장사치들이 호객을 하고 광대패와 차력사들이 온갖 기예를 선보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다른 한쪽에는 환술사들의 기묘한 환술(幻術)이 사람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기도 했다. 강호인들도 제법 보이는데 장검을 등판에 비스듬히 메고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자도 있고 허리춤에 병장기를 차고 거들먹거리며 다니는 자도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신시 초가 되었음에도 사거리 주막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거리에서 일주문 방향으로 이십여 장 떨어진 객점에 주안상과 함께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내 둘이 있다. 한 명은 까무잡잡하고 각진 얼굴로 인해 왠지 단단한 인상이 풍기고 다른 사내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하여 한 눈에 봐도 힘깨나 쓸 것 같다. 까무잡잡하고 단단한 사내는 차를 마시고 있고 덩치는 사내는 곡주를 동이째 갖다놓고 마시고 있다.

둘 사이에 별로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친분이 깊은 것 같지 않았지만 이따금 씩 눈빛을 주고받는 걸보니 누군가를 찾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각진 얼굴의 사내는 찻잔을 들어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가 다시 입술로 가져가 차를 머금고 맛을 음미했다. 뜨내기 손님을 상대로 객점에서 파는 차가 어찌 고급스러우랴 만은 사내는 어떠한 차도 그 자체를 즐기는 다인(茶人)처럼 진지했다. 차를 한 모금 넘기고는 시선을 반쯤 내리깐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숨만 고요히 내쉬었다. 마치 절간의 선승처럼 고요히 집중하는 것 같았다.

반면에 장대한 사내는 곡주 한 동이를 앞에 놓고 표주박으로 한 잔 씩 퍼내며 자작을 하고 있다. 그는 무료한 듯 이따금씩 기지개를 켰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구석진 창가여서 지나가는 행인은 잘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들창 안을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고는 잘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장대한 사내가 메기 같은 입을 쩍 벌리며 크아아 기지개를 펴다가 멈칫했다. 사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거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이 생각한 사람이 맞는가를 확인하는 듯 이번에는 미간을 좁히고 눈을 찌푸렸다. 이어 입가에 빙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았다. 각진 사내는 호흡에 잠겨 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절로 흘러가 그가 원하는 어둠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장대한 사내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각진 사내가 눈에 초점을 모으고 장대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장대한 사내는 손으로 대로를 가리켰다. 각진 사내의 시선이 대로를 향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과 칠팔 세 되는 동자가 여러 가지 방물을 파는 가판대 앞에서 있다. 각진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는 듯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앞에 앉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장대한 사내가 손을 모아 입가에 대자 각진 사내가 귀를 갖다 댔다.

조복이 무영객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무영객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할 수 있겠소?" 무영객이 나직히 말했다. "무공을 모르는 아녀자와 어린애 하나 데려오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기 아니겠소." 조복이 답했다. 아낙과 아이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무영객이 가리키는 눈길을 따라가자 길가에 젊은 승려 하나가 모자에게 눈길을 떼지 않고 서 있다. 승려의 맨머리엔 여섯 개의 계인(契印) 자국이 나 있고 오른 손엔 자줏빛 봉(棒)이 쥐어져 있다.

흐흥, 호위승인가. 저깟, 애송이 소림승 쯤이야 맨손도 아깝고 발길질 두어 번이면 충분하오. 조복은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느냐는 듯 항의조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 나는 나대로 소림을 구석구석 살펴볼 예정이니. 저 모자는 언제쯤 데려올 건가? 오늘은 저들이 묶는 곳을 알아내고 내일 틈을 보아 데려가도록 하지요. 내일 정오까지 묘적암에 도착하겠소. 

필진진은 부친 필대감의 의견에 따라 아들 관섭월과 함께 소림에 피신한지 보름이 되었다. 소림 본사에는 외인이 머물 수 없어서 원명대사의 주선으로 두실봉 자락에 위치한 문수암 객사에 머물고 있었다. 원명대사는 아버지와 교분을 쌓은지 삼십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두실봉은 소실봉 옆의 봉우리로서 소림 본사와는 한나절 거리였다. 원명대사는 금릉 필대감의 서신을 받고는 모자가 지내기에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편리한 암자를 물색하던 중 본사와 멀지 않고 사부대중에게 개방된 사찰이라 고립감이 덜한 문수암으로 정하고는 그곳 객사에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다.

흥법회가 열린다고 하자, 산중의 무료한 생활에 답답해하던 섭월은 마치 명절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손꼽아 기다렸다. 산중 생활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낙양의 선비를 초빙하여 섭월의 독선생으로 앉혔고, 불경도 틈틈이 독송시키면서 원명대사가 호위를 부탁한 소림의 젊은 수좌에게서 무예의 기본자세를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창 또래와 어울려야 할 섭월로서는 산중 생활이 무척이나 고달팠다. 그런데 흥법회라니, 처음엔 고리타분한 법회만 열리는 줄 알았는데 공양주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場)이 선다는 것이다.

단오절에 숙부와 함께 금릉 장시에 가본 이후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섭월은 며칠 전부터 제 어미를 조르더니 드디어 흥법회 첫날 사하촌 난장에 온 것이다. 장터에서 사람 구경, 물건 구경, 재간 구경 실컷 하고 문수암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장터의 활기찬 풍경과 장사꾼들의 높은 목청소리를 들으니 섭월 뿐만 아니라 진진도 생기가 돋는 것 같았다. 산중의 무료함은 그녀에게도 새로운 형태의 자극을 요구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공양을 들자마자 섭월은 진진에게 사하촌 난장에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진진은 엄하게 표정을 짓고는 오늘은 장문인께서 설법을 하는 날이니 만큼 사시에 시작하는 법회에 참석한 후 사하촌에 들려야 한다고 했다. 제 어미의 엄함을 아는지라 섭월은 고집부리지 않고 그러겠다고 답했다. 법회가 끝나고 들리더라도 오후의 난장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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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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