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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상.
차례상. ⓒ wiki commons

한가위다. 처가에 가는데 장모님이 무슨 술을 가져오느냐고 묻는다. 처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 추석과 설날과 제사 때에만 장모님이 술병을 꺼내놓으신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그리고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술을 기꺼이 내놓으신다. 그것은 관습이다. 제사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보았던 것처럼, 차례상을 차리고 제사상을 차리는 것일 게다. 

제사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향 연기와 술잔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인다. 제사의 중간쯤에 새로 메를 지어(이때 밥이라 하지 않고 메라 부른다) 올리고 술잔을 비우고 다시 술잔을 채우는 작업을 반복한다. 퇴주통이 가득 찰 무렵에 제사도 끝나간다. 내가 보았던 어릴 적 제삿날의 풍경이다. 제사가 끝나면 반드시 음복을 했고, 그것은 미성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사상의 술은 망자와 산자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담고 있다. 향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 망자의 혼을 불러오고, 술은 땅에 스며들어 백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혼백을 불러다놓고 지내는 제사에는 향과 술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구축되었다.

정종을 제삿상에 올린다?

 맑은술을 얻기 위해 술덧 속에 용수를 집어넣었다.
맑은술을 얻기 위해 술덧 속에 용수를 집어넣었다. ⓒ 허시명

제사를 지낼 때는 일반적으로 맑은 술을 사용한다. 맑은 술이 청주이고, 청주라면 일본술인 줄로만 알아 정종류를 제주(祭酒)로 삼는 이들이 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맑은 술을 제주로 쓰는 것은 맞지만, 정종이 제주로 오르는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굴절된 역사다. 우리에게도 맑은 술 청주가 있고, 그 청주 계보에는 경주교동법주나 해남 진양주 등의 전통주가 있고 요사이는 상품화된 차례주나 차례술 들이 있다.  

맑은 술을 제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탁한 술보다 맑은 술을 귀하게 여기다보니, 상을 정성들여 차려내면서 맑은 술이 올라간 게 아닐까? 술 빚는 과정을 촘촘히 바라보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얘기가 나온다. 제사상에 올리는 메는 먹던 밥이나 식은 밥을 올리지 않는다. 새로 정성들여 지은 밥을 올린다. 추석 때면 햅쌀로 지은 밥을 올린다. 추석 상에 처음 수확한 쌀로 지은 첫 번째 떠낸 밥을 올리는 것처럼, 추석 때는 햅쌀술, 신도주(新稻酒)를 빚어 올리는 관행이 있다. 아무도 먼저 맛보지 않은 첫술을 올리는데 그게 맑은 술인 것이다.

술을 빚어 잘 익게 되면 지게미는 가라앉고 맑은 술이 위로 떠오른다. 그 술독에서 조심스럽게 처음 떠내면 그게 맑은 술이고, 그 술을 올리다보니 제주는 맑은 술이라는 관행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차례 때는 안 쓰면서 성묘 때 쓰는 소주, 왜?

 성균관 석전제에서 술을 담다.
성균관 석전제에서 술을 담다. ⓒ 허시명

소주는 제사상에 잘 오르지 않는다. 종가를 잘 유지하고, 소주로도 유명한 안동 지방에서 제주로 안동소주를 쓰는 집안을 찾기는 어렵다. 왜 안동 명물 안동소주를 제주로 쓰지 않느냐고 어느 종손에게 물으니, "후손에 독종이 나온다"라고 답했다. 독한 소주가 독종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소주를 제주로 올리지 않는 금기가 있음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제주는 어른아이할 것 없이 음복하게 되는데, 소주를 제주로 쓰면 아이들은 음복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제사라는 관례가 만들어진 이후에 소주가 전래된 것도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 소주는 고려 후기 몽골침략기 때 원나라로부터 들어왔다.

기록되지 않는, 그래서 근원을 따지기 모호한 그 옛날부터 이어져온 제사음식 속에 원시적인 뿌리 열매인 토란은 토란국으로 들어있지만, 연금술사들이 장비를 동원하여 찾아낸 소주는 빠져있었다. 실제 국가 차원에서 지내는 종묘대제나 석전제에서 물이 현주(玄酒)라는 이름으로 오르고, 덜 익은 탁한 술이 오르고, 잘 익은 맑은 술이 오르지만, 소주는 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성묘에 갈 때는 소주를 들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 간편하고 구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성묘할 때 술을 묘 주변에 뿌리는데 (술은 땅에 스며들어 백을 불러오기에) 이때 막걸리나 청주를 뿌리면 벌레가 꼬인다고 피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이유로 벌레가 꾀지 않는 소주를 쓰는 집안이 있다.

모든 술에는 다 이유가 있다

 부정타지 말라고 금줄을 두른 술독.
부정타지 말라고 금줄을 두른 술독. ⓒ 허시명

산신각이나 당산나무 앞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흔히 막걸리를 쓰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산신제를 지내는 시기는 대체로 정월이 많다. 이때 산신각 앞에서 술을 빚어 술독을 묻고 언땅에서 발효를 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술이 잘 익지 않고, 빚는 양도 많지 않다.

그래서 맑은 술이 괼 겨를없이 탁한 채로 걸러 제주로 삼는 경우가 생겨난다. 또 마을 당제를 지낼 때에 제물을 준비하는 제주(祭主)나 화주(化主)로 선정이 되면 제사를 치를 때까지 부부 잠자리를 하지 않고 정갈한 의복을 입고 상가집에도 가지 않고 대문에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이 들지 못하게 한다.

이 기간에 술도 빚어 준비하는데 제주는 거칠고 탁한 경우가 많다. 제주가 술을 잘 빚는 사람도 아닐 뿐더러, 금줄친 기간도 길게 하지 않기에 맑은 술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당산나무 앞에서 당제를 지낼 때에는 그 어떤 술보다 막걸리가 어울려 보인다. 소주를 당산나무에 뿌리면 나무에 해롭지만, 막걸리를 뿌리면 그 뿌린 곳에 미생물이 성장하기 좋아 땅이 거름져지고 나무에도 좋을 테니까.

제주로 탁주를 쓰느냐, 청주를 쓰느냐, 소주를 쓰느냐 하는 문제는 상황 따라, 관행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망자가 살아생전에 즐겼던 열대과일 바나나나 망고가 제사상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소통할 수 있고 추억할 수 있는 거라면 제주(祭酒) 또한 주종불문이 아니겠는가.

 석전제에 오른 세발 달린 술잔, 작.
석전제에 오른 세발 달린 술잔, 작. ⓒ 허시명



#소주#술#막걸리#청주#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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