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는 혁명가, 김삿갓은 방랑자다. 관련성이 전혀 없었을 것 같은 두 남자. 사실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구르미 그린 달빛>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한 사람은 구름, 한 사람은 달빛인 그런 관계였다. 김삿갓의 방랑은 홍경래에게서 시작됐다. 홍경래는 김삿갓의 운명을 그린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홍경래는 구름, 김삿갓은 달빛이었다.
드라마 <구르미>에서 주인공 홍라온(김유정 분)은 '홍경래의 난' 주역인 홍경래의 딸이다. 주인공 효명세자(박보검 분)의 호위무사인 김병연(곽동연 분)은 김삿갓이다. 갓을 쓰고 화려한 검술을 자랑하는 그는, 갓을 쓴 모양이 멋있다 하여 '갓병연'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지난주 방영분(9회~10회)에서는 김병연의 할아버지인 김익순이 집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김병연은 할아버지의 최후를 마루 밑에서 숨죽인 채로 지켜보았다. 이때 드라마 속의 꼬마 김병연이 그 장면을 보고 '아버지'라며 흐느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말한 것 같다. 극 중 배우가 흐느끼며 작게 이야기해서 명확히 듣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어떻게 나왔든 간에, 실제로 김병연은 김익순의 손자였다.
김삿갓 김병연이 후세까지 길이 전해질 유명한 방랑 생활을 시작한 직접적 계기는 할아버지 김익순한테 있었다. 할아버지의 최후 때문에 손자의 방랑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런데 김익순의 최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물은 홍경래였다. 그래서 김삿갓의 방랑이 홍경래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싹'이 보였던 홍경래현재 <구르미 그린 달빛>은 1820년대 초반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부터 반세기 전인 1771년. 영조 임금이 죽기 5년 전이었다. 평안도 용강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홍경래가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학업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집안 형편에 관계없이 실력을 앞세워 출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선생님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내쫓겼다. 초년에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승은 외삼촌 유학권이었다. 유학권이 보기에 홍경래는 조카이기 이전에 탐나는 제자였지만, 탐나는 제자이기 이전에 위험한 불순분자였다. 열 살 전후에 지은 시에 "산에 걸터앉아 강물과 발과 허리를 씻겠다"라거나 "가을바람이 불므로 장사의 주먹으로 백일 안에 임금의 머리를 노리겠다" 같은 표현이 있었다.
시를 본 유학권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홍경래를 집으로 돌려보내며 "내일부터 그만 나오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가정통신문을 손에 쥐여주었다. "경래는 공부는 잘하지만, 생각이 불순하니 주의를 요한다."
외삼촌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생원 혹은 진사(향시)시험의 1차만 합격한 채, 그러니까 생원이나 진사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홍경래는 서른 즈음인 1800년경 혁명을 목표로 방랑길에 나섰다. 김삿갓의 방랑이 있기 전, 그의 방랑이 있었던 것이다.
운명학과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홍경래는 그걸 도구로 돈을 벌면서 각지를 유랑했다. 이때 만난 상인과 부자 상당수가 훗날 거사에 자금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유랑은 혁명을 위한 유랑이었다. 이렇게 해서 1812년, 저 유명한 홍경래의 난이 벌어졌다. 물론 그는 그것을 '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종 역사 서적이나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홍경래의 난이 1811년에 발생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1812년이다. 음력으로 순조 11년 12월 20일자(양력 1812년 2월 2일자) <순조실록>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날은 음력으로는 순조 11년 12월 18일, 양력으로는 1812년 1월 31일이다.
이런 오류는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할 때 아주 흔하게 발생한다. 음력으로 순조 11년 11월 16일까지는 양력 1811년에 해당하고 음력 11월 17일부터는 양력 1812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순조 11년을 무조건 1811년으로 바꾸다 보니까 이런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 김삿갓의 운명을 바꿨다홍경래가 거병한 1812년, 김삿갓 김병연은 여섯 살이었다. 경기도 양주 태생인 김병연은 이때만 해도 유복한 아이였다. 평안도 선천부 부사 김익순이 할아버지였다. 거기다가 세도가인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꼬마 김병연의 미래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임지가 평안도라는 사실이 김씨일가와 김병연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홍경래 군대가 쳐들어오자 선천부사 김익순은 일찌감치 항복을 해버렸다. 반군의 기세가 겁났기 때문이다. 그 뒤 정부군 진영으로 도망친 김익순은 과오를 만회할 목적으로 꾀를 짜냈다. 반군 병사를 포섭한 뒤 "돈을 줄 테니, 홍경래 측근 하나를 죽여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병사는 부탁받은 대로 했다. 하지만 김익순은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런 다음, 상부에 허위보고를 했다. 자기가 직접 홍경래의 부하를 죽였노라고 보고한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들통났고 김익순은 사형을 당했다. 투항 전력에다가 허위보고까지 겹쳐 처벌받은 것이다.
지난 20일 방영된 <구르미> 제10회에서는 김익순이 홍경래 군대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다가 정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김익순은 반군에게 군량미를 제공한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면서 당당하게 죽었다. 그러나 실제 김익순은 판이했다. 처음에는 정부군을 배반하고 나중에는 홍경래를 배반하다가 결국에는 정부군에 허위보고를 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뒤 김익순의 식솔들은 강원도 영월의 산속으로 도피했다. 거기서 신원을 숨긴 채 화전민 생활을 했다. 어린 꼬마 김병연은 무슨 일이 생긴 줄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처형된 뒤 귀양을 갔다가 화병으로 죽었다.
그 후, 김익순은 비겁한 역적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악인 중의 악인으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갔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 이름이 김익순이란 것도 모르고, 어린 김병연은 영월의 깊은 산 속에서 성장해갔다.
13년 뒤인 1825년. 드라마 <구르미>가 현재 보여주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다. 이때 강원도 영월군에서 백일장 대회가 열렸다. 당시의 백일장은 예비 과거시험과 비슷했다. 일종의 모의고사였다. 이 백일장에 열아홉 살짜리 선비 하나가 응시했다. 시험 문제는 '김익순의 죄악을 비판하라'였다.
장원급제는, 김익순의 죄악을 종이 위에다 열렬히 성토한 그 선비의 몫이 되었다. 그의 답안지에는 "너 김익순은 듣거라. ······ 너는 누구의 봉급을 먹은 신하인가? ······ 너의 영혼은 황천에도 못 갈 것이고 ······ 너는 임금을 버린 날에 조상도 버렸으니 ······ 한 번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적혀 있었다. 김익순에 대한 세상의 조롱을 대변해서 열렬히 욕설을 퍼부은 그 선비가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모의고사이기는 하지만 장원급제의 영예를 안은 그 선비. 그는 기분 좋게 귀가해서 홀어머니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집을 나가게 되었다. 김삿갓 방랑의 삶은 그렇게 불현듯 시작됐다.
김익순을 열렬히 성토하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자랑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그간 숨겨놓은 한마디를 입 밖에 꺼냈다. "김(金)자 익(益)자 순(淳)자 쓰시는 그분이 바로 너의 조부님이시다."
이 말에 김병연은 머리가 멍해졌다. "너 김익순은 듣거라! 너의 영혼은 황천에도 못 갈 것이다! 너는 임금을 버린 날에 조상도 버렸다! 너는 만 번 죽어 마땅하다!" 그런 문장들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을 것이다. 심한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그 길로 짐을 싸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나이 열아홉의 수험생이 그렇게 방랑자가 된 것이다.
홍경래의 거병은 김익순의 행보에 영향을 주고, 김익순의 행보는 김삿갓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홍경래가 김삿갓을 방랑의 길로 내몬 셈이다. 그래서 홍경래는 구름이고, 김삿갓은 그 구름이 그린 달빛이었다. <구르미> 속의 김삿갓은 홍경래의 딸을 챙겨주고 홍경래의 딸은 "김형! 김형!" 하며 김삿갓을 따르지만, 두 사람은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