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우상화' 논란이 뜨겁다. 이 와중에 우정사업본부가 내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행사를 앞두고 기념우표까지 발행하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박 전 대통령 사후 37년 만에, 그것도 하필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임을 들어 특혜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반면 우표 발행 주체인 우정사업본부는 기념우표 발행 규정에 따랐을 뿐이라며 특혜 의혹을 일축했다.
과연 현직 대통령 아버지 우상화일까? 단순한 '오비이락'일까?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을 둘러싼 진실을 <오마이팩트>에서 짚었다.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에서 신청, 야당 국회의원들 재검토 요구신경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지난 13일 "우정사업본부가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60만 장을 발행할 예정"이라면서 "취임 기념을 제외한 대통령 주제 기념우표 발행이 중단된 시점에서 과연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이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면서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어 같은 당 유승희 의원은 지난 23일 우정사업본부가 지난 1월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을 위해 우표 발행 관련 내부 규정까지 바꿨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급기야 같은 당 최명길 의원은 26일 우정사업본부에서 지난 5월 23일 열린 우표발행심의위원회 회의록과 속기록을 공개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에서 요청한 박정희 기념우표는 참석 위원 9명 만장일치로 통과된 반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요청한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우표'는 절반 넘게 반대해 탈락했다. 공교롭게 당시 속기록 요약문에는 두 우표에 대한 어떤 논의도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태우 이후 취임 우표만 발행... 퇴임 대통령 우표는 박정희가 처음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을 둘러싼 논란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현직이 아닌 퇴임 대통령 기념우표 발행이 정당한지, 우표 발행 과정에 내부 규정 변경과 같은 특혜 의혹이 있었는지, 마지막으로 우표 발행 심의 과정에 외압이 있었는지 여부다.
지금이야 우표 사용이 급감해 우표수집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기인 1960~1970년대만 해도 우표 사용량만큼 상징성도 컸다.
우정사업본부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4회를 비롯해 해외 대통령 국내 방한 기념우표 11회, 해외 순방 기념우표 1회, 새마을운동 특별우표 1회, 추모특별우표 1회 등 18회나 발행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는 이처럼 대외 활동까지 포함해 전두환 우표 발행량만 7800만 장에 달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 수상 기념우표를 제외하면 취임 기념우표만 발행하고 있고 발행량도 수백만 장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직후인 1980년 2월에 발행한 추모 특별 우표를 빼면 퇴임 이후 우표를 발행한 대통령은 지금까지 없었다. 이번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우표가 사실상 첫 사례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박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우정사업본부까지 합류하는 것은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신경민 의원 지적도 일리가 있는 셈이다.
우표 발행 규정 바뀌기 전에도 '박정희 우표' 신청 가능했다?그렇다면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신청은 특혜일까? 앞서 유승희 의원은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을 위해 우본 내부 규정을 바꿔 역사적 인물도 기념우표 신청 대상에 새로 포함시키고 우표 발행 신청 기간 제한도 없앴다고 지적했다.
실제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1월 20일 내부 규정인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 세칙'(아래 세칙)을 개정하면서 기존 '특수우표'를 '기념우표'로 바꾸면서 그 개념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사건 및 뜻 깊은 일'을 덧붙였다. 아울러 '전년도 3월 31일까지'로 돼 있는 우표 발행 신청 기한도 규정에서 없앴다. 공교롭게 박정희생가보존회는 규정 개정 전이었다면 신청 기한이 지난 4월 8일에 신청했다.
이에 우정사업본부는 "특수우표를 기념우표로 용어만 변경한 것에 불과할 뿐 동 조항의 발행대상 5가지는 종전과 동일하다"고 밝혔다. 실제 세칙 제4조 2항에는 우표 발행 대상 5가지 중 세 번째로 '정부제정 기념일, 역사적으로 기념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인물·사건으로 50주년 또는 100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개정 전후 모두 포함돼 있다. 결국 세칙을 바꾸기 전에도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신청은 가능했다는 얘기다.
신청 기한 규정 삭제에 대해서도 우정사업본부는 "신청기한이 지나더라도 우표발행심의회 개최 전에 신청한 경우에는 관례적으로 모두 반영해 발행하기 때문에 사문화된 규정이어서 폐지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난해 6월 18일 신청한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8월 31일 신청한 '원불교 100년 기념 성업회' 기념우표 사례를 들었다. 이들 우표도 원칙대로라면 우표 발생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진상 우정사업본부 우편정책과장은 26일 "신청기한을 넘겨도 매년 6~7월 전후로 한 차례씩 열리는 우표발행심의위원회 전까지만 신청하면 모두 받아줬다"라면서 "박정희 기념우표 발행 신청 이전에 내부 규정을 바꾼 건 단순한 오비이락"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이같은 규정 개정이 없었더라도 박정희 기념우표 신청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특혜로 보기는 어렵다.
100주년은 되고 70주년은 안 된다? '박정희 우상화 논란'은 외면 문제는 지난 5월 23일 열린 '2016년 1차 우표발행심의위원회'다. 당시 회의에는 내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 17명 가운데 9명이 참석했다. 기념우표 발행 신청 39건 가운데 20건이 통과됐다. 이 가운데 '행사우표' 신청은 7건이었는데 박정희 기념우표를 비롯한 5건만 통과됐고 '백범일지 출간 70주년'과 '제15회 식품안전의 날' 등 2건은 탈락했다.
당시 심의위원들이 '역사적으로 기념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행사'라는 '내용'보다 50주년, 100주년 같은 '형식'을 더 따진 탓이다. 이날 심의위원장은 "기념우표는 다른 나라의 경우 보통 100주년, 50주년을 기본으로 발행"하고 "동계올림픽 등 스포츠 관련 우표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공통적인 관심사"라고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사실상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과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염두에 둔 것이다. 국립공원 도입 50주년을 기념한 '3050 국립공원기념사업'이나 '우당 이회영선생 탄신 150주년'도 그 범주에 들었지만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독립기념관 개관 30주년' '제15회 식품안전의 날' 등은 해당 사항이 없다.
A위원도 "50년, 100년 그런 기준으로 따지자면 '식품안전의 날'이 올해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라며 일찌감치 '식품안전의 날'을 탈락 후보로 지목했다.
특히 B위원은 "내 기억으로는 150주년은 발행된 걸 본 적이 없다"면서 "이회영 선생의 경우 요즘 TV에서 재조명되는 인물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겠지만 좌익, 무정부주의자 등 논란이 있으며, 정치적·종교적 문제가 있는 경우는 우표로 발행하는 데에 있어서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면서 이회영 우표도 배제했다.
하지만 A위원이 "이회영 선생이 활동할 당시에 좌익·우익의 개념이 없었고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만든 분"이라면서 "무정부주의자를 이야기하면 단재 신채호 선생도 교과서에 나오면 안 되며, 너무 심한 잣대를 대는 것은 무리"라고 반박했고 다른 위원도 동조하면서 결국 찬성이 우세해 통과됐다.
반면 이날 '식품안전의 날'과 함께 탈락한 '백범일지 70주년 우표'는 심의위원들 논의조차 없었다. 우정사업본부는 "백범일지 기념우표는 위원들 표결 결과 과반수 미달로 부결됐고 위원들 제안으로 백범김구기념관과 협의해 대신 기념엽서를 발행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기념엽서는 기념우표보다 발행비용과 발행량이 적고 별도 심의 절차도 거치지 않는다.
박진상 과장은 "위원회에서는 (박정희-백범일지 우표 건을) 직접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심의자료는 6일 전에 전달돼 검토 시간은 충분했다"라면서 "50주년, 100주년 단위 행사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김구 선생 인물 우표는 지난 1986년 보통우표 2종을 비롯해 2001년 밀레니엄 우표, 2015년 광복 70주년 우표로 발행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최명길 의원실 관계자는 "박정희 우상화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있는데도 심의위원들이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면서 "딸이 현직 대통령이어서 심의위원들 사이에 암묵적인 눈치 보기가 있지 않았겠나"라고 지적했다.
당시 한 심의위원은 "(우표 발행 인물에) 정치적·종교적 문제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면서 좌익 활동을 문제 삼았는데, 정작 박정희 우상화 논란은 외면했다.
그나마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는 애초 '탄신 100주년 기념'으로 신청했지만 지난 6월 변경 신청을 거쳐 '탄생 100돌 기념'으로 이름을 고쳤다. 적어도 종교 지도자에게나 부여되는 '탄신'이란 표현 자체가 우상화 논란을 부른다는 사실은 뒤늦게 인지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