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지난 총선 당시 '세월호 모욕 후보' 심판을 위해 투표장에 나가라고 독려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칼럼을 선거법 위반으로 문제 삼아 이례적으로 편집기자를 기소했다.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 자행된 '적극적 언론탄압' 때나 있던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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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과 관련해 편집기자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제 강점기엔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보도가 있을 땐 주로 언론사 사장을 구속수사하거나 신문을 정간시키는 일이 흔했다. 해방 이후 5공화국까지, 비일비재 했던 언론인 구속이나 기소의 범위는 편집국장·편집부장·취재기자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현재도 보도 관련 언론중재나 민사소송의 경우 언론사의 대표, 편집 최종 책임자, 기사 작성 기자를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기소 사례처럼, 취재에 관여하지 않은 편집기자나 오탈자 및 비문 수정을 맡은 교열기자의 처벌을 시도한 예는 드물지만 존재한다. 언론사의 편집권에 사사건건 간섭하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일어난 일이다.
장준하 의문사 최초 기사 편집기자 구속... "왜 톱에 배치했나?"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을 최초 보도 기사를 편집한 <동아일보> 편집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장준하 선생이 사망한 이틀 뒤인 1975년 8월 19일 <동아일보>는 사회면 톱으로 '장준하씨 사인에 의문점'이라는 기사를 냈다. 검찰이 추락사라는 경찰 수사결과에 의문을 갖고 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유신 체제 하의 언론으로선 유일하게 장준하 의문사 의혹을 제기한 보도였다.
보도 당일 검찰은 기자회견을 열고 <동아> 보도를 부인하고 사인을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단정했다. 이틀 뒤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는 한석유 지방부장, 장봉진 의정부 주재기자, 성낙오 편집부 기자를 소환조사하고 성 기자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장준하 선생 사인을 왜곡하여 보도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였다.
1차 구속만료일 열흘을 채운 성 기자는 기소유예 처분으로 풀려났다. 조사과정에서 검찰은 장준하 선생 의문사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배치한 이유, 사인에 의혹이 있다는 내용으로 기사 제목을 뽑은 이유 등을 추궁했다. 언론사의 고유권한인 편집권에 검찰이 일일이 간섭한 것이다.
교열기자까지 구속 "반공법 위반 글 왜 안 고쳤나?"유신 이전에도 보도와 관련해 편집기자를 법적으로 처벌한 전례가 있었다. 이번에도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경향신문> 1964년 5월 12일자 가판 3면에는 '난국타개 … 이것부터, 정 내각에 바라는 2백자 민성'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5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이 개각을 단행, 새로운 정일권 내각에 대한 민심의 바람을 요약한 기사였다.
이 기사에 '자유노동자 이형춘'이라는 이름으로 '가뭄이 너무 심해 북한이 준다는 식량지원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내용이 실렸는데, 이것이 쌀 200만석을 남한에 제공하겠다는 북한의 제안에 동조하는 내용이라는 게 문제됐다.
<경향>이 가판을 회수하고 본판에는 이 같은 내용이 삭제됐음에도 서울특별시 경찰국은 반공법 위반을 이유로 민재정 편집국장, 전민호 편집부국장, 신동문 특집부장, 이원종 교정부차장, 추영현 편집부 기자, 박용규·신동백 교정부 기자 등 7명의 기자를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해당 기사를 쓴 추 기자가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상고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돼 풀려났다.
기사 하나로 편집국장을 비롯, 기사 내용에 큰 책임이 없는 교열기자까지 구속한 것이다. 당시 5월 1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박태원 치안국장은 교정부 기자들까지 구속한데 대해, '반공법에 위배되는 글을 보고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구속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