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 한눈에
- 두 명의 한국 대통령을 겪으면서, 한국은 두뇌 없는 로봇으로 전락한 듯하다.
- 국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오히려 뻔뻔스러워질 때, 국민은 고통받으면서도 저항하지 않을 때, 그 나라는 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처럼 답을 써서 죄송해요."내가 몸담은 미국 대학은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다. 한산하던 도서관이 주말에도 붐비기 시작하고, 자판기에 카페인이 든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때가 온 것이다.
초췌한 얼굴들로부터 시험지를 거둬 연구실로 돌아온다. 채점을 서너 개쯤 끝냈을까, 문제의 '트럼프 답안지'가 눈에 들어왔다. 학생은 꽤 긴 답을 쓴 뒤 괄호를 열고 앞의 글귀를 적어 놓았다.
'트럼프처럼 답을 썼다'니 무슨 말일까? 다행히 '개,' '돼지,' (최근 공개된) 'XX' 같은 욕설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답을 모르는 사람이 대체로 그러듯,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길게 늘여 지면을 채워놓았을 뿐이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텅 빈 말, 학생은 그것을 '트럼프식 답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그 답변으로 점수를 받지는 못했으나, 학생은 트럼프 논란의 핵심만큼은 잘 파악하고 있던 셈이다. 트럼프는 언제나 말로 논란을 불러일으키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험악한 수사를 빼고 나면, 그의 말에는 어떤 의미 있는 내용도 담겨있지 않다. 어쩌면 트럼프의 '유독성' 발언은 내용의 빈곤을 감추기 위한 전략일지 모른다.
정말 위험한 것은 '거친 입'이 아니라 '빈 머리'
한국에서도 트럼프는 '막말'로 잘 알려져 있다. 정말이지, 되는대로 내뱉는 말을 듣고 있자면 그가 지도자로서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를 정말 위험한 인물로 만드는 것은 '입'보다 '머리'다.
꼭 머리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매우 영리한 사람이다. 그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안다. 매우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정치인은 대중들이 공감할 언어를 찾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럴 필요가 없다. 평생 대중의 언어를 써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적 언어와 사적 언어를 구분하지 않는 미국 최초의 대선 후보일 것이다.
정치인은 대개 모호한 언어를 구사한다. '다양성,' '공동체' 같은 추상적 가치를 다루는 탓이기도 하지만, 최대한 많은 유권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뚜렷한 선 긋기를 주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단순하고 거친 언어는 이 미끈한 '위선의 언어'를 혐오해 온 다수의 국민들에게 청량감을 준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의 부상은 '대중 정치혁명'이라 할 만하다. 정치인의 언어로 대중을 흔드는 게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정치를 흔들어 대권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는 성희롱 발언 비디오가 공개되어 맹렬히 비난받고 있고, 공화당 유력 정치인들 다수가 지지를 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핵심 지지세력은 절대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야말로 대중들과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부동산 재벌이자 연예계 스타로, 전 세계에 수십 채의 고층건물과 호텔, 리조트를 가지고 있고(한때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공동소유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언론 매체와 모델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단 의류, 보석, 향수를 세계 12개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물론 그곳을 둘러볼 때는 개인소유의 757 제트기와 헬리콥터를 이용한다.
이런 트럼프를 다수의 서민들이 '자신의 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정치적 금기어'에 구애받지 않고 발언하는 그가 자신들의 절망과 분노를 이해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하는 듯 보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며, '이해하는 것'과 '해결하는 것'은 더더욱 다른 문제다.
트럼프는 서민들의 문제를 이해할 경험의 공감대도, 그 문제를 해결할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일자리, 세금, 불법 이민자 등을 둘러싼 대중들의 불평에 대해 생생한 '날것의' 언어로 함께 분노하며, '다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고 포효할 뿐이다.
도대체 어떤 시절의 미국이 '위대한 미국'이었는지,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부분은 '입'이나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머리'와 '의지'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최고로', '진짜로'가 대책인 후보구체적 해결책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트럼프는 회피와 동문서답 사이를 오간다. 실업 대책은 "조물주가 만든 최고의 일자리 대통령이 되겠다"이고, 이슬람 국가(IS)의 위협에 대처할 방안은 "적들이 알면 안 되니까 미리 말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런 농담 같은 현실에 대해 트럼프의 비판자들은 또 다른 농담으로 답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면 미국의 최초 여자 대통령. 트럼프가 당선되면?""미국의 마지막 대통령."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이 망할 거라는 이야기인데, 미국 유권자 절반 가까이가 상상조차 꺼리는 이 '끔찍한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빌 클린턴 시절 미국에 와서 부시와 오바마의 연임을 지켜보았고, 이제 미국 45대 대통령의 탄생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이처럼 미국에서 꽤 오래 지낸 편인데도, 트럼프의 미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트럼프가 당선되더라도 역사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통치자가 직접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민주국가는커녕, 왕조시대에도 없던 몰상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진 정부 교과서를 내용조차 공개하지 않은 채 사라고 강요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를 양심적인 사업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상품을 써 본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환불하는 원칙 정도는 지켜온 사람이다.
둘째, 트럼프가 백악관 집무실에 자리를 틀더라도, 300명이 넘는 국민이 물에 빠져 숨져가는 순간 대통령이 증발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 시절부터 '지도자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해 온 사람이다. 나는 결코 그가 훌륭한 지도자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국민 목숨을 지키지 못한 것도 모자라 희생자 가족을 외면하고 괴롭힌다면 이건 '훌륭한 지도자'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셋째, 자신을 비판한 연예인과 작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탄압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트럼프 맞선 가장 강력한 저항군은 할리우드 연예인과 작가들이다. 제니퍼 로렌스,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벤 스틸러, 잭 블랙, 수잔 서랜든, 새뮤얼 잭슨, 조니 뎁, 리처드 기어 등의 스타 배우와 스티븐 킹과 조앤 롤링 등의 작가들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로버트 드 니로는 선거 독려 비디오에 출연해 트럼프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만큼 멍청하다"고 말을 연 뒤, "그는 개, 돼지, 사기꾼이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머저리'"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이어서 "나는 (그를 대권 주자까지 만든) 우리 처지가 너무 화가 난다"며 트럼프 특유의 거친 화법을 고스란히 주인에게 되돌려준다.
"트럼프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사실은 내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다." 끝으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 해도 검찰이 언론사 편집기자를 기소하는 기막힌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언론학자인 나는 앞의 문장을 쓰면서 매우 낯이 뜨거워졌다. 그동안 나는 한국이 민주국가 흉내는 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검찰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쓴 기사를 검토했다는 이유로 편집부 기자를 선거법으로 기소했을 때, 내가 한국사회를 과대평가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소위 '민주국가'의 검찰이 언론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검찰, 본지 편집기자 기소 "살아남을 언론사 있겠나").
뻔뻔한 정부와 저항하지 않는 국민, 그런 국가는 망한다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를 기소한 서울중앙지검 공안 2부(이성규 부장검사)는 이미 국정원 대선 개입의 '봐주기 기소'로 이름을 떨친 바 있기 때문이다. '좌익효수'라는 아이디를 쓰는 국정원 직원은 대선 직전 '죄인은 죄인일 뿐, 문제 많은 사람 문제인…죄인은 부엉바위에서 자폭하라'는 글을 비롯해 야당 후보를 비방하고 호남의 유권자들을 '뒈지게 패야된당께 홍어종자들' 등으로 모욕하는 글 수백 개를 올렸다. 하지만 검찰은 고소장을 받은 뒤 2년을 끌다가 선거법 공소시효가 지난 뒤에야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런 검찰이 "세월호 모욕 총선 후보, 성평등을 가로막는 정치인, 성소수자 혐오 의원 등 명단의 존재와 명단에 포함된 김진태·김무성·김진표·박지원 등의 여·야 후보자들을 되짚어 봐야 한다"는 <오마이뉴스> 기사를 걸고 넘어졌다. 이 내용이 공직자선거법 위반에 해당하며, 시민기자가 쓴 글에서 이 부분을 걸러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편집부 기자를 기소한 것이다.
현재 트럼프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MSNBC> 등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 언론이 그의 과거 이력과 발언, 정책, 자질 등을 혹독하게 검증해 온 탓이다. 트럼프는 미국 언론이 자신에게만 유독 가혹하다고 주장하며 '고소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지만, 지난 30년간 트럼프가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를 본 적이 없다. 법에 호소해 봐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업인과 공직자 등의 권력자가 언론과 유권자의 감시를 받는 것은 민주국가의 기초 중의 기초다.
두 명의 한국 대통령을 겪으면서, 한국은 두뇌 없는 로봇으로 전락한 듯하다. 로봇의 머리가 열리고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조종석'에 앉으면 나라 전체가 통치자의 의식 수준으로 '하향조정'되기 때문이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온 나라가 그의 판단 수준으로 일제히 맞춰지는 '의식 공산화'가 일어난다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교육부의 국정교과서 강행, 검찰의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기소, 청와대에서 문화체육부로 전달됐다는 연예인 '블랙리스트', 서울대 병원의 백남기 '병사' 사망진단서, 이화여대의 '최순실 딸 모시기'는 한국 사회의 모든 법과 제도가 통치자에 봉사하는 손발로 전락해 버린 참담한 현실을 보여준다.
아니나다를까.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오후 수석비서관회의 자리에서 최근 불거진 최순실과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 등과 관련 "요즘 각종 의혹이 확산되고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가중시킬 수 있다"라고 일축했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국민들이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 땅이 다른 곳에 팔려가는 것도 아닐 터이다. 국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서도 오히려 뻔뻔스러워질 때, 국민은 고통받으면서도 저항하지 않을 때, 그 나라는 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이라 믿는 미국인들이 있다고 했다. 바야흐로 소셜미디어 시대인만큼,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과 '마지막 대통령' 농담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돈 남 나무란다'고, 남의 나라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트럼프가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그의 당선은 '미래'와 '가정' 이야기이지만, 한국 상황은 '현재'와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두 후보를 합친 인물에 가깝다. "최초의 여자 대통령"인 동시에 "마지막 대통령"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