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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크고 마음이 자라는~"
"야야야, 거기 손이 그렇게 나가면 안 되지!"


나는 참았던 성질이 폭발했다. 학예회는 고작 일주일 남았는데 공연에 올려야 할 수화가 펑크 났다. 한 달 전부터 연습했는데 동작을 정확히 따라 하지 못하는 남자애들이 네 명 있었다. 이번 공연만큼은 아이들을 닦달하지 말고, 수업 시간 빼먹지 말고, 화내지 말고 준비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여기 셋은 점심 먹고 따로 검사받으세요."
"그럼 Y는요?"
"엉? Y는 그냥... 옆에서 같이 해."


정말이지 수화를 하겠다고 한 건 미친 짓이었다. 아니다. 그래도 잘했다. 잘하긴 뭘 잘해? 골치만 아픈데. 하루에도 수차례나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한 달 전 교무부장님이 각 반별 학예회 프로그램을 제출하라고 했다. 공연 뛰는 애들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방송댄스가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Cheer up>으로 하자고 했다. 그래, 편하게 가자는 마음에 댄스로 결정하고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그럼 Y는요?"

멈칫했다. Y는 도움반(특수교육교실) 친구이다. Y도 춤을 출 수는 있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각 잡힌 안무는 안 나온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성격 급한 J가 Y를 빼고 하면 안 되냐고 물었다. 인상 한 번 팍 쓰고, '학예회가 아이돌 팬클럽 잔치인 줄 아냐'고 핀잔을 줬다.

"학예회는 우리 반 전체가 협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행사예요. Y 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결국 수화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로 일방적으로 합의(?)했다. 배경음악은 '넌 할 수 있어 라고 말해주세요'로 골랐다.

'후후 30일이나 남았으니 짬 나는 시간 틈틈이 하면 문제없겠군.'

유튜브에 올라온 수화전문가의 동영상을 따라 하는 아이들이 참 예뻤다. 흐뭇한 눈빛으로 반을 훑어보는데 Y가 낑낑거리면서 손을 옆으로 댔다, 위로 찔렀다, 이마에 댔다 반복했다. 아뿔싸, 살짝 불안했다.

그런데 그때는 첫 연습이라 애들이 다 못했다. Y가 이 정도는 금방 따라올 거라고 합리화했다. 따지고 보면 수화가 댄스보다 Y에게 더 어려울 수 있는데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선생은 일정을 강행했다.

수화를 익히지 못한 Y, 초조했는데...
 
 학예회 3일 전 알림장. 담임의 불안한 심리가 여실히 느껴진다.
학예회 3일 전 알림장. 담임의 불안한 심리가 여실히 느껴진다. ⓒ 이준수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하루, 이틀, 일주일, 이주일... Y는 제자리걸음이었다. Y를 위해 시작했는데 정작 Y가 소외되고 있었다. 춤 좀 추는 여자애들은 열흘 남짓, 어지간한 애들도 보름이면 동작을 마스터했다. 이제 누가 맞고, 틀린 지 확연히 구분되었다. 지금 와서 되돌릴 수 없었다. 의상도 맞췄고 실내화도 하얀색으로 통일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긴 해야 했다.

Y를 붙잡고 일대일로 동작을 반복 지도했다. Y는 시범 직후에는 엇비슷하게 따라 했지만 두 번째 차례에는 기억을 못 하였다. 들어가는 손짓을 보면 아! 하면서 들어오고, 교사가 빠지면 까먹고 지루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초조한 기색을 표정으로 읽었는지 Y가 내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수화를 시킨 것 때문에 미안했는데 어쩔 줄 모르는 Y의 얼굴을 보니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못해도 돼. 느리게 들어가도 되고, 틀려도 되니까 옆에 친구 하는 거 보고 따라 하기만 해."
"네. 선생님."


순진하게 생겨서 저렇게 해맑게 대답하는 걸 보면 속세에 찌든 나는 말을 잃게 된다. 남 가르치는 직업이라고 은연중에 품고 있는 온갖 지적 허영과 위선들이 Y의 미소 앞에서는 얇은 유리처럼 박살 났다. 몇 글자 더 쓸 줄 안다고 스승이 아니라 마음 움직이는 게 참스승인데 Y는 태어날 때부터 그걸 아는 사람 같았다.

부끄러움에 Y 앞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다른 아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사라진 자리는 애들이 채웠다. 마지막까지 동작을 외우지 못한 최후의 4인을 위해 반에서 가장 기능이 뛰어난 연서, 영지, 금빈이가 과외 선생으로 투입되었다. 조급함이 말끝에 배어있는 어른보다 또래 교사는 부드럽고 평화적으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내가 가르칠 때보다 솔직히 더 나았다.

드디어 학예회 하루 전, 최종 리허설이었다. 이제 Y를 제외하고 모두가 동작을 익혔다.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고 감독석에서 지켜보는데 신기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한 타이밍이 늦긴 했지만, Y는 거의 동작을 따라오고 있었다. 분명 교실에서 개인별로 점검할 때는 못 외웠다. 비결은 Y의 옆과 뒤에 선 석원과 호동이의 짧은 지시음과 재빠른 터치, 앞에서 지켜보는 지현이의 강렬한 눈빛이었다.

아이들은 Y를 뒷줄 제일 선두 자리에 배치해서 기가 막히게 상황을 리드했다. Y가 암기는 약해도 눈치는 있었다. 애들이 주요 지점마다 핵심 동작을 짚어주니 Y가 요리조리 살피다가 그 신호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좀 어긋나면 어떤가? 23명 아이들 틈에 섞여 있으니 수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보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본 공연은 어떻게 되었냐고? 야간 무대의 화려한 조명 세례를 받으며 아이들은 무사히 수화를 마쳤다. 물론 Y에게 보내는 온갖 사인들도 공개되었다. 나중에 뒤풀이 자리에서 들었는데 남들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고, 도움반 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휴대폰에서는 학급 SNS에 학부모님들이 올린 수화 공연 실시간 영상과 사진 등록 알림이 계속 울렸다. 사진 속 아이들은 진지했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 하나. 공연을 끝내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맞이하며 어두운 체육관 통로에 서 있었다. 일일이 등 두드려주며 격려하는데 Y 차례가 왔다. Y는 코를 벌렁거렸다. 흥분하면 나오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상기된 얼굴을 한 Y는 관객들에게 마지막 무대 인사용으로 썼던 노란 종이를 건넸다. 모퉁이가 땀으로 젖어있었다.

축축하고 너덜너덜한 노랑 종이. Y가 공연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했는지 종이의 촉감이 모두 말해주고 있었다. Y야, 넌 이미 잘했어. 앞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통합학급의 힘은 협동과 격려에서 나온다. 친구의 도움으로 Y는 끝까지 맡은 역할을 다 했다.
통합학급의 힘은 협동과 격려에서 나온다. 친구의 도움으로 Y는 끝까지 맡은 역할을 다 했다. ⓒ 이준수

#학예회#장애#수화#넌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세요#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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