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금, 날마다 '최순실 잔치'다. 기사가 쏟아진다. 언론사에 있는 나도 그날 나온 기사를 다 챙겨보지 못할 정도다. 단독, 특종은 또 얼마나 많은지. 퇴근 후 뉴스를 확인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평소라면 믿기 어려운 이야기마저 SNS에서 농담처럼 떠돌 정도다.
이뿐인가. 최순실은 이른바 '<한겨레>와 <조선일보>의 이상한 좌우 컬래버레이션'이라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표현대로 '<조선>이 JTBC와 <한겨레>를 인용하고, <한겨레>가 <조선일보>와 TV조선을 인용하는 한국언론사에 매우 낯설고 상징적인 순간'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나를 놀라게 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프랑스에 살며 글을 쓰는 작가 목수정의 책 <아무도 무릎 꿇지 않은 밤>이다. 목 작가는 이 책 프롤로그에 썼다.
'머리와 심장 사이로 피가 들끓고 솟구치고 역류하던, 잠들 수 없던 그 밤들이 시작된 건 온갖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었던 2012년 12월의 대선, 허술한 기만이 우리 사회를 점령하던 무렵'이었노라고. 그로부터 3년, 정확히 박근혜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목 작가는 이쪽(프랑스)과 저쪽(대한민국)을 오가며 '세상과 미친 듯이 소통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 글들을 모은 이 책을 두세 번 읽었다. 한두 번은 인터뷰(관련기사 :
"자발적 복종 아닌 '연대의 힘'이 우릴 구할 것")를 위해, 또 한 번은 내가 느낀 기시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기시감이란 알다시피 '처음 접하게 되는 사물이나 풍경 또는, 사건인데도 예전에 보았던(겪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비선실세 의혹을 받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이대 입시 비리 의혹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사과까지 이어지는 뉴스 홍수 속에서 목 작가의 글 한 대목 한 대목이 묘하게 겹쳤다.
[기시감 ①] 당신들의 계급을 동정한다'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불만이면 종목을 갈아타야지. 남의 욕하기 바쁘니 아무리 다른 거 한들 어디 성공하겠니?' - 2014년 12월 3일 정유라 sns공감은커녕 동정을 샀던 '비선실세' 의혹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페북에 쓴 글이다. 읽자마자 '당신들의 계급을 동정한다'는 글이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목 작가는 이 글에서 광복 70년을 맞이한 즈음 난데없이 옛 남친을 떠올린다. '소위 친일파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을 아버지'로 둔, "부천에도 이층집이 있어?" 같은 터무니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던, '선거에는 티끌만한 관심도 보이지 않던'. 한편 목 작가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고문에 돌아가신 독립운동가였고, 그 덕에 집안의 장님이었던 아버지는 매 순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며 살아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역사 앞에 떳떳한 계급과 역사를 계속 매장해야만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는 계급의 두 사람이 손을 맞잡는 건 불가능하다. 비루하게 왜곡된 역사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청산되지 못한 역사, 거짓이 계속 거짓을 부르게 만드는 이 고단한 시대의 패배자는 속죄의 길을 찾지 못하여 계속 비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다. 나는 당신들의 계급을 동정한다."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같은 글이다. 실제 정유라의 발언이 알려지고 난 뒤 SNS에는 '덕분에 내 노력이 빛난다', '결석만 해도 B+ 받는 법', '교수님 저 밤새고 B- 받았습니다', '금메달, 다그닥 성공적' 등등이라는 비아냥이 이어졌다. 적어도 그를 부러워 하는 사람은 없었단 말이다.
[기사감 ②] 사과,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행동목 작가는 지난해 12월 28일 타결된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지켜보며 이렇게 썼다.
'아베는 당연히 그 사과를 할 수 없다. 위대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니까. 오욕의 비틀린 역사를 바로 잡고, 깨끗이 사과하고, 용서하고, 새로 출발하는 일은 결코 박근혜나 아베 같은 소인배들의 시대에서 이뤄질 수 없다.''박근혜는 사과를 할 수 없다'는 목 작가의 예상을 깨고, (상황은 좀 다르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최순실 문건 유출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그것도 녹화방송으로!).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께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중략)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 최순실 문건 유출 관련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사과문'그러나 '거짓된' 사과였다.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넘어 '안보·외교·인사 정보도 포함'된 것으로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나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순수한 마음이라고 한 일'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이 측은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몰랐을까. 왜 부끄러움은 국민 몫인 건지... 끝으로 목 작가가 '도움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상처받는 것이다'에서 인용한 김훈 작가의 글을 재인용한다.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 아닌가 싶어서.
'도움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상처받는 것이다. 도움은 도움을 주는 쪽에 절대적인 선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는 쪽의 자기 자존의 정당한 몫을 해치기 때문이다.'[기시감 ③] 우리가 복원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선진국이란 들춰보지 않아도 약속대로 사회 구석구석이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회를 말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각자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그 무엇 하나 법대로, 원칙대로, 약속대로 이행되지 않고 뒷구멍을 통해 수를 쓰면 다른 결과가 나오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우리나라는 오랜 독재의 기억이 비정상적인 힘, 법 이외의 관행에 의해 사회가 굴러가는 것을 내버려 둔 것 같다.'마치 지금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글이다. 목 작가의 이 같은 일갈은 25일 파리에서 다시 이어진다.
'지금 이 순간 제일 미운 놈들은 검찰이다. 뇌물 챙기고, 스폰서 끌어들여 재산 불리고, 성상납 받고, 노조파괴하고, 멀쩡한 사람 간첩 만들고, 삼성 앞에선 머리 조아리고, 그리고 니들이 또 할 줄 아는게 뭐더라. 홍승희 징역 구형하고, 홍가혜 대법원까지 기어이 끌고 가고... 그러느라 바빠서 최순실이 이러고 댕기는 거 니들은 몰랐다 이거지. JTBC에서 이 모든 정보 다 캐낼 때까지, 니들은 그냥 손 놓고 있었단 거잖아. 최순실이 외국에 있어서 당췌 잡을 수도 없단 거고. 그럼 대체 이 나라에서 검찰의 존재 이유는 뭘까. 왜 이 나라가 당신들에게 밥을 먹여야 하는 거지? (중략)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란 직업은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직업이란 사실을 알기 바란다. 선무당이 조작하는 꼭두각시 밑에서, 그 꼭두각시의 실체를 알면서도 무릎으로 기는 자들이 바로 당신들이니까.' - 목 작가의 sns비선실세 의혹을 받는 최순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여당 실세들과 검찰 등등이 욕 먹는 이유에 대한 시원한 정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