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씨가 대통령의 연설문과 인사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자 온 나라는 충격에 휩싸였다.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할 것 같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17.5%로 폭락했다(27일 리얼미터).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탄핵'과 '하야'가 상위권에 올랐다.
국민 대부분이 충격을 받았지만 누구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박근혜 번역기' 페이스북 계정을 운영하던 김지명씨다. 지인의 의뢰로 박 대통령의 발언을 번역(?)하기 시작한 김씨는 인수분해라는 수학 공식까지 적용하는 등 박 대통령 발언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에 개입했다는 보도가 나간 24일 밤 김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JTBC가 보도한 '최순실 PC서 대통령 연설문 의혹 확인' 기사와 함께 "박근혜 번역기 개발자로서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라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김씨의 심경이 궁금해 지난 26일 김씨를 광화문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은 김씨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대통령의 말, 누가 써준다는 생각 들었는데..."- 지난 24일 JTBC가 입수한 최순실씨의 태블릿PC에서 박근혜 대통령 연설문 44건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어요. 이에 김지명씨는 페이스북에 "박근혜 번역기 개발자로서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라는 글을 올렸어요. 충격이 크셨나 봐요?"그렇죠. 2015년 6월부터, 아마 전국에서 인터넷에 박근혜를 가장 많이 검색한 사람 중에 한 명이 저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인지 충격이 큽니다.
- 보도를 보시고 어떤 기분이 드셨는지?"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누가 또 우리 박근혜 대통령을 음해하려고 하는구나. 말이 안 된다'라고 생각했는데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하니깐 정말 영화 같고, 소름이 돋더라고요."
- 박 대통령의 발언을 인수분해까지 해가며 번역을 했는데, 그 말들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개입했다는 것에 배신감이 드시는 것 같아요."대한민국의 최고 존엄, 최고 권력 VIP의 말씀을 번역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말이죠.
- 박근혜 번역기(현 헬조선번역기)에 "저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라고 올리셨던데."그 멘트는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조직 보스인 김영철에게 하는 대사인데요. 영화에서 이병헌 씨가 느낀 그 배신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적었어요."
- 페이스북에 쓴 글이 기사화가 되었어요. 예상하셨나요?"그냥 늘 하듯이 페이스북에 올렸을 뿐인데 아무래도 최순실이라는 키워드가 핫하다 보니 기사화가 된 것 같아요.
- 지난해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 발언에 대해 "박 대통령의 할 말을 누군가 써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잖아요. (관련 기사: "박 대통령 '유체이탈 화법', 단어들 인수분해하며 유추") 결과론적으로 맞는 말이었어요. 다시 보니 소름 끼치던데."그때 인터뷰했을 당시가 생각이 나는데요. 페이지를 운영하면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많은 분이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으니 번역 좀 해달라'는 제보를 해주세요. 그래서 보내온 자료들을 읽어 보면 '아, 이분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본인이 모르고 있는 것 같다'라는 느낌이 계속 있었어요.
그래도 저는 '청와대 보좌진이나 김기춘 비서실장이 써주는 걸 잘 이해 못 하고 이야기를 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민간인 최순실이 그 배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깐 저도 깜짝 놀랐어요."
- 스스로도 신기했을 것 같아요. 그냥 느낌으로 한 말인데."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누군가 뒤에서 써준다고 생각을 많이 하셨고 추측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실제로 번역을 하다 보니깐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 최근에 번역한 게 있나요?"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생각돼서 관심을 안 주고 있고요. 페이지도 박근혜 번역기에서 헬조선 번역기로 이름을 바꿨어요."
- 애정이 떨어졌나 봐요?"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한때는 제 스마트폰 사진첩에는 온통 박근혜 대통령 사진으로 가득했거든요. 그리고 요즘 텔레그램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텔레그램 스티커 중에 박근혜 스티커도 제가 다 손수 만들어서 배포했거든요."
- "내가 누굴 번역한 건가"라는 자조의 글도 올리셨잖아요."하루아침에 박근혜 번역기가 아니라 최순실 번역기가 되어버린 것인데 정체성의 혼란이 온 것이죠. 경험하진 못했지만, 출생의 비밀을 다룬 막장 드라마를 보면 김씨로 30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 친아빠가 나타나서 '너는 이제 박씨'라고 하잖아요. 그때 느끼는 당혹감과 비슷하지 않을까요?(웃음)."
"최순실 번역기로 계정 이름 바꿀 터... 박 대통령은 '하야'가 답"- 25일, 박 대통령이 연설문 유출을 인정하고 사과했는데 어떻게 보셨어요?"우선 세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첫 번째, 대국민 사과를 아이돌 쇼케이스도 아니고 사전 녹화를 한 점이 어이가 없었고요. 두 번째, 2014년 4월 16일, 많은 아이들이 시커먼 물속에서 죽어갈 때도 7시간 동안 보이지 않았고 참사 이후에도 33일이 지나서야 대국민사과도 아니고 대국민담화를 했잖아요.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 땐 이렇게 빨리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이 이상했어요.
세 번째, 저는 누군가에게 사과할 때는 6가지 요소를 담아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하고, 그 잘못에 대한 후회를 표명하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하고, 마지막 용서 구하는 말을 꼭 해야 했어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1분 40초짜리 대국민 사과에는 변명이 주로 있었어요. 그건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서 사람 죽여 놓고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한다고 사과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 박근혜 번역기 개발자로 어떤 사과를 원해요?"저는 대통령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 '박근혜 번역기'에서 '헬조선 번역기'로 이름을 바꾸셨잖아요. 물론 시차가 있긴 하지만 박 대통령이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번역기 개발자가 쓰는 것은 불충 아닌가요?"박근혜 대통령이 무슨 이야기를 하셨든 이제 더 이상 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심을 보여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저께 뉴스를 보고 '최순실 번역기'로 페이스북 페이지 이름을 변경 신청했어요. 이제부터 제 마음속의 진정한 대통령은 최순실이거든요. 빨리 독일에서 한국으로 들어오셨으면 합니다."
- 박 대통령이 서운해하실 것 같아요."뭐, 최순실씨가 커피 한 잔 사주고 옷 한 벌 사주고 다독거려주면 풀리지 않을까요(웃음)?"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헬조선 생활 웹툰을 만들고 싶어요. 헬조선에서 살아가고 있는 20대 30대가 공감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웹툰이요. 조물주 위에 건물주, 금수저, 흙수저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는데 그 단어에 캐릭터를 부여해서 웹툰을 준비하고 있어요. 연말까지 준비해서 페이스북에 페이지에서 연재할 생각입니다."
-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에게 한마디 해주세요."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무슨 얘기냐면 하야를 하셔야 한다는 거죠. 남은 여생 정치를 하시기보다는 해외여행 다니면서 사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 어차피 지금도 그러시잖아요."지금은 대통령이니깐 눈치가 좀 보이잖아요. 깔끔하게 내려오시고, 책임 질 것들이 있으면 도의적이던 법적이든 책임을 다 지고 나서 훌훌 털고 자유롭게 여행 다니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