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29일의 광화문 광장도 시민들의 분노로 젖었다. 그러나 분노에 폭력은 없었다. 경찰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칭찬했다. 올해 4월 말, 프랑스 낭트에서는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폭력이 있었고, 경찰의 칭찬은 없었다.
공적 기관에게 '성숙한 시민'임을 인정받은 내가, 프랑스 낭트의 비성숙한 시민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폭력을 행사했는가? 당신은 유구한 시민사회, 민주사회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의 국민이 아닌가? 평화시위가 민주·시민사회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라면, 당신네들의 사회는 대한민국보다 도태된 사회인가?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개인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할 수 있도록 이를 양도하는 것이다. 만약 압도적인 폭력을 가진 기관이 없다면, 개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서로 끊임없이 싸울 것이다. 경찰은 내부의 범죄자로부터, 군대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한다. 만약 위협의 대상이 없다면 벌거벗은 개인은 보호받을 필요가 없으며, 그 기능체인 국가 또한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국가의 존재 이유가 '위험'에서 비롯된다면, 실재적 작동 기제는 '폭력'이다. 국가폭력은 두 가지 형태로 작동한다. 첫째로, 잠재적 위험에 '물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이를 제거한다. 범죄자들을 잡아 교도소에 보낸다. 침략한 타국에 군대에 총과 포를 쏜다.
둘째로, '폭력의 행사 가능성' 자체로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여 이를 억제한다. 이 '가능성'만으로도 범죄자들은 범죄를 쉽게 저지르지 못하고, 다른 국가는 쉽게 침략하지 못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 가능성에 기반한 심리적 폭력이 더 효과적이며 일반적이다.
이 두 가지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합법적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치안 유지 또는 국토 방어 이외에 사용되는 모든 폭력은 불법이다. '합법적 폭력'이라는 뒤틀린 수사가 성립하는 주체는 국가뿐이다.
그런데 만약 합법적 폭력을 가하는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개인이 국가에 양도하였던 폭력을 국가로부터 다시 빼앗아야 할 것이다. 그 직접적인 방법이 바로 저항권 행사, 즉 시위이다. 폭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국가에게 그 폭력을 빼앗겠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때 폭력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국회나 청와대에 들어가 들고 나올 수는 없다. 국가가 스스로에게 온전히 양도되었다고 생각했던 폭력을 시민들이 직접 행사함으로써 탈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것이 시위이다. 국가의 통치 기제인 '물리적 폭력' 뿐만 아니라 '폭력의 행사 가능성' 모두를 시민 스스로가 시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합법적인 폭력 행사는 국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불법이다.
지난 2015년 11월 민중 총궐기가 있었다. 국정 교과서, 쌀값 인상 공약 불이행 등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집시법을 위반하고 행진했고, 경찰은 진압했다. 양방향의 폭력이 있었다. 그러나 한쪽은 불법폭력이었고, 한쪽은 합법적 국가폭력이었다. 한쪽은 죽었고, 한쪽은 사과하지 않았다.
이 시위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불법시위' 또는 '불법 폭력사태'로 규정했다. 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은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옳지 않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위법이 시위의 본질을 흐린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쐈던 경찰에게 시민은 칭찬을 받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위법하게 권력을 사유화했다. 법치의 대상은 시민뿐이었다. 법을 지키기 않으나 합법적인 국가폭력에게 저항하는 시민은 평화적이어야 하는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폭력사태를 일으키자는 주장이 아니다. 본질을 흐리는 적법성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저항권 행사 이전에 다양한 정치적 시도가 있어야 한다. 의회를 통해 선출된 거국내각, 다음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 그러나 이 점진적 공학들 뒤에 남겨진 우리가 거세된 시민이어서는 안된다.
듣지 못하는 집권당, 말하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폭력의 행사 가능성'이 거세된 시민들의 외침은 점진적 개혁으로 바뀔 수 없다. 경찰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칭찬받았다고 자축할 일이 아니다. 시위의 본질을 이해하고, 적법성 프레임을 넘어서서 사유할 수 있는 시민만이 개혁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