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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제도 폐지' 국가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형 판결은 내려지고 있는 바, 유형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등 최악의 흉악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사형 제도 존폐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 집행을 하지도 폐지를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결은 내리고 집행을 하지 않는 양상이 2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 와중에 가까운 나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도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2012년 아베의 재집권 이후 17명의 사형수에게 사형 집행을 내렸다. 당연히 첨예한 논란과 대립이 있지만,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가해자의 인권보다 사회 정의 발현 목소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겠다.

그러나 제아무리 살인 이상의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인간 이하'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로서니,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사형 판결이 아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집행'(또는 판결)을 한 후에 누명인 게 밝혀지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고의가 아닌 살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회개하고 뉘우치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는 경우엔? 유족이 받아들인다면?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논란을 소설적 재미로

일본의 유명 추리 소설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고의 데뷔작이자 문제작 <13계단>은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속에서 펼쳐지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은 물론이거니와 사형 집행 실행자, 그리고 사형 집행 명령 절차가 출현한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다양한 유형의 가해자, 즉 사형수가 있다. 고의에 의한 흉악 살인, 합당한(?) 이유에 의한 살인, 미심쩍은 살인, 정당방위 살인, 살인 누명 등이다. '사형 집행'이 필요하되, 반드시 철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편 소설 자체는 극강의 재미를 선사한다. 첨예한 대립과 논란이 될 만한 요소를 가져와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데 썼다.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바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13계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피말리는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 그 저승사자가 멈추는 그곳에 헤아리기 힘든 죽음의 공포. 이 짧은 프롤로그로 독자는 이미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사형'이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어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교도관 난고. 오랫동안 이어온 교도관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재회해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거금이 필요한데 때마침 의뢰가 들어온다. 사건 당시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형수 사카키바라 료의 무죄를 입증하라는 것. 몇몇 석연치 않은 점들과 그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점 그리고 최근 우연히 돌아온 기억 속의 '계단'이 전부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전과자 준이치. 다툼 도중에 상대방을 죽이게 해 상해 치사죄로 2년을 복역하다 얼마 전에 출소했다. 그는 부모님이 엄청난 거금을 피해자 유족에게 지불해 어려움에 처한 걸 알고는, 난고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거금을 받으며 난고가 하려는 일을 도우라는 것. 료의 무죄를 입증하고 진범을 찾아내 바로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 그 이후엔 료의 사형 집행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속출하는 다양한 유형의 피해자들

기억을 잃은, 즉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가 사형 판결을 받아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그에게서는 잘못을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사형 집행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거나 다름 없다. 사형 제도의 첨예한 논쟁 속에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어도 괜찮은가.

최근 '삼례3인조' 사건의 사법피해자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17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에 이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고, 진범으로 추정되는 이가 잡혔다. 16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사형수 료는 7년 째 복역 중이며 사형 집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야기의 정황상 그의 무죄가 드러날 텐데, 그 억울함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 무죄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 억울함과는 별개로 피해자 유족의 억울함은 어떠한가. 가해자가 사형을 당한다 해도 피해당사자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평생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나마 가해자의 사형이 유일한 안식일지 모른다. 어느 누가 그들을 욕하랴? 어느 모로 보나 가해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한다. '사형'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행태의 하나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테다.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가해자 아닌 가해자, 피해자 아닌 피해자로서, 경계에 서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록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만,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을 것인가.

피해자는 속출한다. 실질적으로 가해를 행한 이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아니,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순 없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누명을 쓴 이들은 제쳐두고,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이유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다. 이 또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한데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그렇지만 아마 직접적으로 의견을 입 밖에 내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공분을 살 '사형 집행 절차'의 황당함

<13계단>에서 무엇보다 공분을 살 내용은 '사형 집행 절차'에 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절차.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형 제도 찬반 논쟁은 여기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거대하고 그칠 줄 모르는 그 논쟁 속에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가려진 문제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더 중요할 수 있다.

"160번은 법이 지켜야 할 이익, 법익을 침해했기에 처형당한다. 난고는 유족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 여성은 가족을 모두 살해당하고도 피고인의 사형을 원치 않는다. 내일의 처형은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가.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 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닐까." (본문 186~187쪽 중에서)

"난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얄궃은 미소를 띠었다. 같은 해에 체포된 사키카바라 료가 이미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 오하라는 아직 확정도 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재판 제도가 지닌 문제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을 범한 경우,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죽인 쪽이 심의 과정이 지체되면서 오래 살 수 있다." (본문 215~216쪽 중에서)

"역대 법무 장관 중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방패 삼아 사형 집행 명령을 거부한 장관이 있었다. 또한 이유를 명언하지 않더라도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은 장관도 몇이나 있다. 그러한 행동은 사형 제도 반대론자들에게는 환영받을지 몰라도 명확한 직무 유기였다. 집행 명령이 법률에 장관의 직무로 규정된 이상, 그게 싫으면 장관 취임을 거절해야 마땅하다. 법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권력의 자리에만 앉으려 하는 것은 법무 당무에 있는 자로서 납득할 수 없다." (본문 240쪽 중에서)

"누가 이것을 보상해 줄까요. 민사 재판이 성사되었더라도, 위자료라는 이름의 푼돈으로 유리의 마음을 다시 사 들일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상처에만 상해죄가 적용되고, 망가진 사람의 마음은 방치되는 것입니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나쁜 인간은 범한 죄에 걸맞게 올바르게 심판받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 367쪽 중에서)

추리소설과 사회파 소설의 조합 그 이상

<13계단>은 추리 소설다운 서스펜스와 사회파 소설이 가지는 문제제기가 굉장히 훌륭하게 버무러져 있는 소설이다. 거기에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영화를 보는 듯한 전개, 그리고 정녕 관련 논문 이상 가는 정보와 이론과 주장과 실제는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사형 제도와 관련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서술 또한 이 소설이 단순한 추리 소설 이상가는 소설이라는 점을 입증해주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지금은 그의 또 다른 걸작이자 대작 <제노사이드>를 읽고 있다고 살포시 고백한다. 일반 대중을 위시한 재미, 평단 제위를 위시한 메시지와 소설다움, 그 사이 어딘가를 위시한 '있어 보이는, 실제로 뭔가 있는' 소설로서의 매력까지 두루 갖춘 소설을 본 후인 만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모조리 가해자다. 그런 면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또 그들은 모조리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류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인간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느껴야 한다.

살인을 하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자가 사회를 위해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게끔 허락해야 하는가? 그들은 교화의 대상인가, 응보의 대상인가. '가해를 위한 가해'는 애초에 생각의 대상이 아니다. 여지가 없다.

반면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서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가해 쪽으로 발을 딛게 된 이들은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여지는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다. 내 곁에 그런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극 중에서 사키카바라 료가 무죄로 방면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막힘 없이 대답하는 친구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때는 또 녀석과 함께 열심히 할 겁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3계단>,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 펴냄, 2005년 12월)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황금가지(2005)


#13계단#다카노 가즈아키#사형 제도#가해자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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