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네이버, 다음 검색창에 '맹탕'을 쳤더니, 검색어 자동 완성 목록에 '맹탕 청문회'가 떴다. 청문회와 맹탕이 짝꿍처럼 붙어 다니는 걸 보며, '뭔가 고민 없이 쓰는 습관적 관용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맹탕'은 맹물처럼 아주 싱거운 국을 뜻한다. 사실 이번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아래 국조특위)'의 청문회는 맹탕보다 퍽퍽한 고구마에 가까웠다. 식도가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은 1~5차 청문회 내내 가시지 않았다. 맹탕이라도 들이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최순실 일가 중 장시호씨를 뺀 어느 누구도 청문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청와대 핵심관계자인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과 문고리 3인방(정호성·이재만·안봉근), 그리고 박근혜·최순실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두 행정관(이영선·윤전추)도 끝내 청문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1~3차 청문회 불출석 증인을 모아 18명을 증인으로 채택한 5차 청문회에는 단 2명만 출석해 텅텅 빈자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국조특위는 26일 구치소에 있는 피의자 신분의 증인(최순실, 안종범, 정호성)들을 만나기 위해 직접 구치소에 가기로 결정했다. 1997년 한보그룹 청문회 이후 19년 만의 일이지만, 이 역시 증인들이 안 나오면 발길을 돌려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청문회에 출석한 핵심 증인들도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했다. 특히 재벌총수들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조여옥 대위 등의 입에서는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등의 말이 반복적으로 쏟아졌다. 이재용부터 우병우까지, 최순실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네티즌 수사대에 딱 걸려 "이젠 모른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예외).
불출석 처벌?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 현행법과 판례상, 증인은 청문회장에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다. 불출석한 증인은 사회적 지탄과 정말 가끔 내려지는 벌금형만 감당하면 된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 불출석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의 벌금 ▲ 국회모욕(동행명령장 거부 등)은 5년 이하의 징역 ▲ 위증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다.
하지만 그동안 법 적용이 맹탕이었다. 청문회에 불출석 또는 위증으로 처벌된 사례는 극히 드물고, 그나마 벌금형을 받은 게 전부였다. 13~19대 국회까지 동행명령장 거부에 따른 국회모욕죄로 고발된 24건 중 22건이 무혐의 처리됐고, 그나마 2건도 벌금형이었다.
정치권도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차 청문회 하루 전(5일)에 만난 국조특위 소속 의원 보좌관은 "마음먹고 청문회를 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다"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다른 보좌관은 "나한테 '사실을 인정하고 받게 될 형벌과 불출석하고 받게 될 벌금형 중 무얼 선택할래'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라며 자조 섞인 농담도 내놨다.
국조특위 구성이 확정(11월 17일)된 이후 만난 야당의 한 고위 관계자는 "(현재 구조에서의) 청문회는 검찰 수사 혹은 특검을 서포트(지원)해주는 개념이다. 일종의 공갈용인 셈이다"라며 청문회의 한계점을 지적했다.
각 의원들에게 주어진 시간도 다소 부족했다는 평가다. 의원 18명이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질의해도, 1명에게 주어진 시간은 20여 분에 불과했다(기본질의 7분, 추가질의 5분, 보충질의 5분, 기타 재보충질의 등). 또 다른 보좌관은 "언론 노출의 형평성을 위해, 질의를 짧게 돌아가면서 하는 구조였다"라며 "그러면 진득하게 증인을 추궁하기 어렵다. 조금 캐내려고 하면 마이크가 꺼져버리는 상황이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위증 처벌, 이번엔 가능할까
이러한 한계 속에 진행된 고구마 청문회를 그나마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가끔 물김치 같은 시원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의원들의 화려한 개인기, 일부 증인들의 폭로, 속속 터져 나온 에피소드도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즉석에서 의원들에게 전달된 '누리꾼 원격 제보'는 이번 청문회의 꽃이었다.
주식 빼고 다 잘한다는 '주갤(디시인사이드 주식갤러리)'의 '팩트 폭력'에, 철옹성 같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손을 떨며 최순실씨를 안다고 털어놨다. 뿐만 아니라, 위증 교사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던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은 사진 몇 장에 확신범으로 전락했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도시락을 가져왔다"던 조력자(알고 보니 이정국 정강 전무)는 청문회장에서 내뺐다.
어쨌든 이번 고구마 청문회 이후, 구조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여야가 모두 이른바 '우병우 방지법'을 추진하고 있다. 불출석 관련 처벌을 강화하고, 동행명령장을 집행하는 국회 사무처 직원이 특별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수행한다는 내용 등 '국회에서의 증언·감정법 개정안'이 현재 발의돼 있다.
뿐만 아니라, 김성태 국조특위 위원장은 "동행명령장을 거부하고, 위증한 증인을 국회 모욕죄로 고발하겠다"라고 발표했다. 물론 과거의 사례를 볼 때, 동행명령장 거부와 관련된 고발로 얼마나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위증과 관련된 고발은 이전에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지켜볼 만하다. 김 위원장은 "과거 국조특위는 활동을 끝내고 위증한 증인을 한 번도 고발하지 않았다"라며 "이번에는 청문회가 끝난 뒤 위증한 증인들을 분류해 모두 고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국조특위의 활동 만료일은 다음 달 15일이다. 활동 기한은 여야 협의를 통해 30일 연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