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읽다 보면, 신라 왕실의 족보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어느 시대건 간에, 평민이 아닌 왕족인 경우에는 족보를 밝히는 게 어렵지 않다. 기록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KBS 드라마 <화랑>의 배경을 이루는 신라 왕실의 경우에는 족보가 헷갈리는 일이 매우 많다. 특정한 왕족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두고 기록이 상반되는 경우들이 많다.
예컨대,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편에는 제3대 임금인 유리의 왕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왕비가 박일지의 딸이라고 한 뒤, 김허루의 딸이란 말도 있다고 소개했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왕들의 내력) 편에서는 이 왕비가 사요왕인 김허루의 딸이라고 말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기록을 접하게 되면, 우리 시대 사람들은 둘 중 하나가 틀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시중에 나와 있는 신라 역사서들 역시, 그중 하나만 맞을 거라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김춘추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편에서는 김춘추를 두고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의 아들"이라고 한 뒤, 김용춘이 아니라 김용수일 수도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김용춘의 아들"이라고 한 뒤 "용춘을 용수라고도 한다"고 말했다. 두 기록을 읽다 보면, 김춘추의 아버지가 김용춘일까 김용수일까 아니면 김용춘과 김용수가 동일인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대체 어느 기록이 정확할까 하고 궁금해 하게 된다.
위작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의문을 명쾌하게 풀어주는 책이 있다. 바로 필사본 <화랑세기>다. 이 책에서는 신라 왕족들의 아버지 혈통이 헷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준다.
'배를 문질러 낳은 자식' 마복자<화랑세기>에는 마복자(摩腹子)란 단어가 나온다. 배를 마찰시켜, 배를 문질러서 낳은 자식이란 뜻이다. 배우자와의 잠자리를 통해 얻은 자식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신라 왕실에서는 이런 자녀에게 마복자란 지위를 인정했다. 바로 이 마복자 제도를 파헤쳐 보면, 유리왕 왕비나 김춘추의 아버지가 둘 이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삼국사기>를 읽어 보면, 신라 초기의 왕비들이 초대 왕비인 알영의 혈통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 초기에는 알영을 중심으로 왕비족이 형성됐던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그 후에는 새로운 왕비족들이 등장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란 왕비족이 그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은 대원신통 계열이었다.
왕족과 더불어 왕비족도 있었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아버지는 왕족이고 어머니는 왕비족인 사람만이 왕위계승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왕위계승권자가 남성인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왕비족 여성과 결혼해야만 왕권의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남성이 없을 때는 아버지는 왕족이고 어머니는 왕비족인 여성이 왕위를 계승했다.
왕이 되려면 왕족은 물론이고 왕비족의 혈통까지 받아야 하고 결혼도 왕비족과 해야 하다 보니, 신라 왕실에서는 왕비족 여성의 존재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의 왕비족 여성을 두고 왕족 남성들이 분쟁을 벌이지 않으려면, 여러 남성이 한 명의 여성과 결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신라 왕실에서는 남성 왕족이 다른 남성들과 함께 왕비족 여성 A의 공동 남편이 되는 동시에, 또 다른 남성들과 그룹을 이뤄 왕비족 여성 B의 공동 남편이 되는 일이 많았다. 왕실의 후손을 최대한 많이 낳을 목적으로 이런 결혼 제도를 용인했던 것이다.
이런 독특한 문화 속에서, 공동 남편들은 A가 낳은 아이에 대해 공동 책임과 권리를 행사했다. 아이의 친부인 '갑'은 물론이고 공동 남편인 '을'과 '병'도 아이에 대해 책임과 권리를 가진 것이다.
이로 인해, 출생한 아이는 갑에게는 친자가 되고 을과 병에게는 마복자가 되었다. 을과 병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A와 잠자리를 가져서 낳은 아이가 아니라, A의 배를 문지르는 것과 같은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낳은 아이였다. 그래서 마복자는 양자보다도 훨씬 가까웠다. 을과 병은 그 아이에 대해서 평생토록 후견인의 역할을 했다.
이런 풍습을 생각하면 유리왕 왕비가 박일지의 딸이거나 김허루의 딸이었다는 기록과, 김춘추가 김용수의 아들이거나 김용춘의 아들이었다는 기록이 더는 모호하지 않게 된다. 유리왕의 왕비는 어머니가 박일지와 김허루를 공동 남편으로 둔 상태에서 출생했고, 김춘추 역시 어머니가 김용수와 김용춘 형제를 공동 남편으로 둔 상태에서 출생했던 것이다. 실제로 <화랑세기>에는 김용수·김용춘 형제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와 같은 집에서 생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명의 아이를 두고 여러 아버지가 공존화는 문화드라마 <화랑>에는 박영실(김창완 분)이란 왕족이 등장한다. 드라마 속의 박영실에게는 반류(도지한 분)라는 양자가 있다. 박영실에게 아들이 없기 때문에 반류가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박영실의 양자로 들였다는 게 드라마의 이야기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따르면, 영실은 그런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자식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영실은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진골정통)의 공동 남편인 동시에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의 공동 남편이었다. 이런 복합적인 혼인관계 속에서 그는 자기 혈통을 이은 친자녀도 낳고 자기 혈통이 아닌 마복녀·마복자도 얻었다. 그는 마복녀·마복자에 대해서도 친자녀 이상의 정성을 쏟아야 했다.
이렇게 신라 왕실에는 한 명의 아이를 두고 여러 아버지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이런 문화가 명확히 정리되지 못하고 모호하게 기술되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신라인들의 혈통을 두고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일차적으로 김부식의 책임이 크다. 유학자인 그는 <삼국사기>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신라 왕실의 가족 문화를 모호하게 기술했다.
유교주의자인 김부식의 입장에서는 한 여성이 여러 명의 남편을 갖거나 한 아이가 여러 명의 아버지를 갖는 문화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 왕족들에게 여러 명의 공동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아버지가 갑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훨씬 나중에 나왔다. <삼국사기>의 잘못된 서술 방식이 고려인들의 역사 인식을 지배한 상태에서 <삼국유사>가 나왔기 때문에, 이 책 역시 <삼국사기>의 오류를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라 왕실의 독특한 문화가 후세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