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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필사' 바람이 불어요. 좋은 글이나 훌륭한 글이나 가슴으로 스미는 글을 옮기거나 베껴서 적기에 한자말로 '필사'라 하지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에서 '필사(筆寫)'라는 낱말을 찾아보는 분이 있을까요? '필사'는 "베끼어 씀"을 뜻합니다. 그러니 '필사 = 베껴쓰기'이지요. 우리가 조금만 더 생각을 기울일 수 있다면 '베껴쓰기'라는 낱말을 뜻풀이 그대로 알맞게 지어서 쓸 수 있어요. 베껴서 쓴다는 말이 좀 내키지 않는다면 '배워쓰기'나 '새겨쓰기'처럼 새말을 지을 수 있고요. 즐겁게 말을 살리는 길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이들한테 '필사'를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자, 옮겨서 써 보렴"이나 "자, 따라서 써 보렴"이나 "자, 베껴서 써 보렴"이라 말해야 알아듣습니다.
아이들한테 '필사'를 말하면 못 알아들어요. "자, 옮겨서 써 보렴"이나 "자, 따라서 써 보렴"이나 "자, 베껴서 써 보렴"이라 말해야 알아듣습니다. ⓒ 최종규

배워쓰기

요즈음은 학교에서 숙제를 예전보다 덜 낸다고 해요. 그렇지만 숙제가 사라지지는 않으니 숙제 때문에 어깨가 무거운 어린이가 많아요. 학교 숙제가 없어도 학원 숙제가 있기도 하고요. 예전에 숙제가 짐스러워 고단할 적에 동무끼리 숙제를 주고받으며 '베껴쓰기'를 하기도 했어요. 도무지 혼자 다 해내기 어렵다고 여기니, 다른 사람 것을 그대로 따라서 적어 놓아요. '베끼다'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짓거나 이룬 것을 그대로 따라서 한다고 할 적에 쓰는 말이에요. 숙제를 베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멋지게 이룬 것을 베끼기도 해요.

베낄 적에는 두 갈래로 나뉘어요. 하나는 배우려고 베껴요. 아직 하나도 모르니 먼저 가만히 베끼면서 배웁니다. 다른 하나는 훔치려고 베껴요. 나 스스로 못한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그냥 가져다 쓰지요. 배우려는 베낌은 '베껴쓰기'이면서 '배워쓰기'라고 할 만해요. 훌륭한 글이나 책이 있으면 정갈한 글씨로 옮겨서 적을 만해요. 이는 '옮겨쓰기'이기도 해요. 이러면서 '새겨쓰기'가 돼요. 마음에 새겨서 쓰니까요. 베끼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옮기며, 옮기면서 새기는 일은 우리가 손수 하니 '손수쓰기'이기도 해요. 손글씨로 편지를 적어 띄우면 '손글쓰기'라고 할 만해요.

나그네집, 길손집

제가 나고 자란 고장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고장을 두루 다니는 사람을 두고 '나그네'라고 해요. 나들이를 다니기에 나그네인데,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낱말인 '떠돌이'가 있어요. 따로 어느 곳에 머물 마음이 없이 어디로든 그저 떠돌 적에 떠돌이예요. 우리가 사는 집이나 마을에 찾아온 이라면 '손·손님'이지요. 이웃은 우리한테 손님이고, 나는 이웃한테 손님이에요. 길을 가다가 살짝 들르면 '길손'이에요. 멀리 길을 가다가 다리를 쉬거나 하룻밤 묵으려고 하면 '길손집'에 들어요. 길손이 머물기에 길손집인데, 이 이름보다는 '여관·호텔·게스트하우스·모텔' 같은 이름이 우리한테 더 익숙할 수 있어요. 어느 모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여행이나 나들이를 다니면서 머무는 곳을 길손집 말고 '나그네집'이라고 해 볼 수 있어요. '길보금자리'나 '길둥지'처럼 새롭게 이름을 붙여 볼 수 있고요. 이밖에 또 어떤 이름을 살갑거나 사랑스럽게 지어 볼 만할까요?

하늘소금

하늘에서 소금을 내려 줍니다. 비처럼 내리는 소금은 아닙니다만, 소금 한 줌을 하늘이 내려 줍니다. 그래서 '하늘소금'입니다. 따사롭거나 뜨겁게 내리쬐는 해님이 하늘에 있어서 하늘이 내려 주는 소금이에요. 이러한 소금은 하늘소금이면서 '해소금'이 될 테지요. '햇볕소금'이나 '볕소금'이 되기도 할 테고요. 눈부신 햇살을 머금어 '햇살소금'일 수도 있어요. 때로는 바다가 베풀어 '바닷소금'입니다. 하늘빛을 닮은 새파란 바다가 담긴 소금이에요. 쪽빛 같은 바다가 내어주는 소금이에요. 눈처럼 새하얀 소금인데, 이 하얀 빛깔에는 하늘빛하고 바다빛하고 햇빛이 듬뿍 스며요. 드넓은 바다는 우리 밥상맡에 짭조름한 맛을 베풀어 주고 싶어서 소금을 내어줍니다. 하늘이랑 해랑 바다가 나란히 어우러져서 소금 한 줌이 태어납니다. 이러고 보면 우리가 먹는 소금은 '하늘해바다소금'인 셈일까요? 하늘도 해도 바다도 이름을 뺄 수 없잖아요. 하늘꽃 같은 소금이요, 해꽃이나 바다꽃 같은 소금입니다.

만들다

내 이름을 '지어(짓다)'요. 내가 바라보는 나무나 풀에는 먼 옛날 누군가 지어 준 이름이 있어요. 새한테도 벌레한테도 누군가 이름을 지어 주지요. 시골에서는 흙을 짓거나 농사를 지어요. 함께 즐겁게 부를 노래를 짓지요. 줄을 지어서 서고, 글이나 책을 지어요. 어른뿐 아니라 어린이도 삶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살림을 짓습니다. 집이나 옷이나 밥을 짓고, 웃음이나 눈물을 지어요. 재미난 이야기를 짓고, 약을 지으며, 없는 말을 지어서 장난을 치거나 놀이를 해요. 잘못을 짓기도 하지만, 일이 잘 끝나도록 마무리를 지어요.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짝을 지어서 놀아요. 그러니까 밥이나 빵이나 국수나 두부는 '만들지(만들다)' 않습니다. 밥은 짓거나 하거나 끓이지요. 빵은 구워요. 국수는 삶고, 두부는 쑵니다. 요리나 음식을 할 적에도 "요리를 하다"나 "음식을 하다"라 할 뿐 "요리를 만들다"라고 하면 살짝 엉뚱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짓다·만들다'를 제대로 가려서 쓰지 않고 뒤섞어서 쓰지요. 사람들이 손이랑 마음을 써서 새롭게 이룰 적에는 으레 '짓다'라는 말을 씁니다. 갑작스레 나타나거나 공장에서 자동차를 찍듯이 새롭게 이룰 적에 비로소 '만들다'라는 말을 써야 알맞아요.

뜯는곳

과자나 라면은 으레 봉지에 담아서 팔아요. 과자나 라면을 뜯을 적에 잘 살피면 어느 한쪽에 조그마한 글씨로 적힌 '뜯는곳'이라는 말을 볼 수 있어요. 우유 같은 마실거리라면 한쪽에 잔글씨로 적힌 '여는곳'이라는 말을 볼 수 있고요. 때로는 '따는곳'이나 '찢는곳'이라는 말이 적힐 수 있어요. 예전에는 이런 자리에 '개봉선' 같은 한자말만 적혔지만 요새는 어린이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쉬운 한국말로 고쳐서 적어 놓아요. 언뜻 보기에는 아무것이 아니라 할 만한 말마디이지만, 이런 자리에 어떤 말을 적어 놓느냐에 따라서 쓰임새가 무척 달라지겠지요?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적어 놓은 과자하고 어린이가 알아듣기 어렵거나 못 알아들을 만한 말을 적어 놓은 과자는 사뭇 다를 테니까요. 맞붙은 것을 뗀다고 할 적에 '뜯는다'고 해요. 맞붙든 맞붙지 않든 잡아당겨서 가를 적에는 '찢는다'고 하고요. 서울말은 '뜯다'이고, 사투리로 '튿다'를 써요. 바느질을 한 자리가 풀릴 적에 '뜯어지다'라고도 하고, '튿어지다'라고도 해요.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 너무 신나게 뛰놀면 옷이 뜯어지거나 튿어질 수 있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우리말 살려쓰기#우리말#한국말#삶말#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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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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