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생명울배움터는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고민하며 2014년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시작했습니다. 2015년에는 생명의 교육을 일구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나' 자신부터 교육하고자 '공적 글쓰기'를 주제로 교육문화연구학교를 열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사'를 공부합니다.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이 땅이 나아갈 길에 대해 수렴과 응집의 점을 찍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걸음을 걸어왔는지, 지난 과거를 다시 돌아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가늠하려 합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 - 과거 현재 미래'는 2016년 9월 24일부터 2017년 1월 21일까지 총 19회로 진행합니다. - 기자 말 1월 13일 금요일 퇴근길, 지하철 4호선이 고장 났다. 이수역 승강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스마트폰에 의지하여 앞 사람 발뒤꿈치만 보며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멈춰 섰다. 15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밀지 마세요" 서로를 압착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집에는 갈 수 있겠나" 누군가는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하나 갈팡질팡했다.
나도 초조했다. 2016년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역사 공부모임에 꼼짝없이 지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아니었다. 이날 공부 모임을 기사로 작성하기로 했으니까. 우여곡절 끝에 버스로 갈아타고 20분 늦게 새들연구소에 도착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헐레벌떡 연구소 문을 열었다. 순간, 아름다운 노랫가락이 초조한 마음을 녹였다.
사랑은 언제나 가슴 아픈 언제나 슬픔사랑은 언제나 그리움 아픈 그리움사랑은 언제나 생명 그리고 어둠사랑은 언제나 만남 그리고 이별사랑은 언제나 소망 그리고 기도사랑은 언제나 침묵 그리고 의무사랑은 그렇게 위로 그리고 환희사랑은 그렇게 힘 그리고 노동사랑은 그렇게 언제나 사랑 사랑은 그렇게 절절한 구원사랑은 그렇게 뜨거운 행함사랑은 그렇게 사랑은 그렇게 삶(사랑의 의무, 작사·작곡 최봉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17번째 모임은 '정성과 진실로 만드는 사랑'이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 간절한 고백으로 '사랑의 의무'를 열창하며 시작했다.
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에서는 매주 금요일 '역사-과거·현재·미래'라는 주제로 공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양진일, 이만열, 이이화, 김삼웅 선생님의 역사 강의를 들었다. 이후에 <조선상고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그리고 <한국통사>를 읽고 함께 공부했다. 이번 시간에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고 자신이 써 온 글을 나누며 토론했다.
역사 공부 끝 무렵, '왜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 역사와 월터 브루그만이라는 서양 구약학자의 책이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함께 토론하며 지금까지 해 왔던 역사 공부의 맥락을 되짚어 보니 알 수 있었다. 왜 지금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야만 했는지.
예언자는 점쟁이가 아니다월터 브루그만은 저명한 구약학자이다. 브루그만은 첫 번째 작품인 <예언자적 상상력>(1978)에서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자나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문화에 대항하여 '애통'과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을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감 없이 전하며, 희망을 꿈꾸는 사람, 그가 참 예언자이다.
저자는 구약학자답게 성서에 기반을 두고 주장을 펼쳐나간다. 모세, 예레미야, 이사야, 그들은 모두 당시 사회 현실을 말씀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 예언자들이다. 이들의 총합이자 예언자적 상상력의 결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브루그만은 미국 교회가 소비주의에 빠져 있음을 우려하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의 만행을 낱낱이 드러낸다. 그 만행은 풍요의 경제, 억압의 정치, 그리고 내재적 종교로 연결되어 있다.
솔로몬은 엄청난 풍요를 누렸다(왕상 4:20-23). 하지만 솔로몬은 그 풍요를 골고루 나누지 않았다. 자신과 측근들만 배부른 식생활을 누렸다. 그리고 억압적인 정치를 펼쳤다(왕상 5:13-18). 왕실을 위해 노동을 착취했다. 더 이상 그에게서 정의와 긍휼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통해 통제되고 정적인 종교를 확립했다(왕상 8:12-13). 자기가 지은 성전 안에 하나님을 가뒀다. 하나님의 자유를 속박한 왕권은 민중을 더 철저히 통제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솔로몬의 만행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지금 대한민국 상황과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대기업은 끝없는 풍요의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 '뇌물'이라는 거름을 뿌린다. 급한 마음에 '위증'이라는 비료도 마구 뿌려댄다. 그 풍요를 나누면 좋지 않을까. 그랬다면, 생활고에 시달리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던 송파 세 모녀(2014)의 피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풍요를 조장하는 소비사회는 본질을 흐린다. 최순실 국정 농단 특검수사가 한창인 이때, '최순실 구두'와 '정유라 패딩'이 화제가 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현상인가?
구약에 솔로몬 억압정치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김기춘·조윤선 '블랙리스트' 정치가 있다. 진실을 노래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억압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한 일인가?
이 시국에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예수 믿고 천국만 가면 되는 것인가. 헌금, 봉사, 전도만 강조하며 교회 몸집 부풀리는 것이 구원인가? 언제까지 더러운 권력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핥을 것인가. 아, 비통하다.
그러나 더 이상 아파만하거나 비판만 할 수 없다. 이 역사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새로운 대안을 활성화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예언자적 상상력, 213쪽>결국, 브루그만이 주장하는 예언자적 상상력은 허상이 아니다. 추상과 관념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다. 확신에 찬 하위공동체 구성원의 구체적 실천이다. 구체적 실천으로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한다. 어둠의 왕권의식은 빛의 자녀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역사를 바로 알고, 애통과 희망의 새 노래를 부르며, 하늘의 존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평소 시를 즐겨 짓는 이재호 씨(34세)는 모든 문제의 시작은 '무감각'에서 온다고 말했다. 특히, 그동안 자신의 글과 시에서 시대에 대한 아픔과 공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앞으로는 자신의 글과 시를 통해 현실에서 고난 받는 이들의 아픔을 상상의 노래로 풀어내겠다고 다짐했다.
김민수 씨(36세)는 추상적 언어가 진정한 '애통'을 가로막는다고 이야기했다. 배움터경당 선생님인 그는 최근 몸으로 장난치는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아이들이 이내 알아듣기 어려운 '신체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사용하려 했다고 반성했다. 더불어 대한민국의 빈곤, 비리, 부패 등의 단어도 자기 안에 추상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아픈 현실을 바꿔내기 위해서는 자기부터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우리 삶에 추상적 언어가 얼마나 많이 뿌리 내리고 있는가. 이 추상적 언어는 구체적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이다. 경계해야 한다.
선취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같은 책, 100쪽>애굽의 바로 왕은 과도한 노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다(출애굽기 1:11-14).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와 같은 말도 안 되는 한국판 애굽 노역 정책이 하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취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정의와 긍휼이 가득한 대한민국을 상상해야 한다.
"예언자적 목회는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일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거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같은 책, 207쪽>새들생명울배움터 최봉실 대표는 일상에서 옆 사람의 현실을 철저히 만나야 한다며, 전태일 열사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전태일은 자기 가족, 자기 곁에 있던 여공들을 사랑했습니다. 구체적 일상에서 서로를 깊이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험 없는 전(全)관망적 애통은 알맹이 없는 애통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현실을 철저하게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능합니다. 옆 사람에게 계속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관심합니다. 왜냐하면 바쁜 일상 가운데 자기에게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전태일 열사는 어린 여공들이 먼지 구더기 속에서 하루 평균 14~16시간 노동을 하는 현실을 애통해 했다. 여공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기 옆에 있는 한 사람을 돕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다. 결국 근로기준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행동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정신으로 예언자적 삶을 살았다.
최봉실 대표는 전태일과 같이 가까운 관계에서 실질적인 애통을 느끼고 있는지 도전했다. 가까운 사람의 아픔을 외면한 채 민족 전체의 아픔을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순간적 감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내 옆의 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삶의 시작이다.
박애영(38)씨는 역사 속에서 애통해하며 살았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필명을 '애통'으로 지었다고 했다. 자신의 이름 '애'와 한국통사의 '통'을 붙여 필명을 만들었다. 그 필명에는 '애(愛) 통(通)'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결국 사랑이 통한다면서.
나를 비워내는 사랑, 부어지는 상상최 대표는 상상을 하고 꿈을 꾸고 애통하는 목적은 자기를 결국 강화하는 것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고 '나를 비우는 것'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비움은 다른 존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모습에 고정되려는 나의 관성을 뛰어넘어, 이웃을 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를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고 말했다.
"오직 한 존재를 위하는 마음을 붙잡을 때, 이 땅을 위하는 마음을 붙잡을 때 상상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상상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상상이 구체적인 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노력의 목표는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려는 마음을 경계하고 겸손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만드는 상태를 만드는 것입니다."우리에게 전태일의 삶이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옆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공들을 위해 자기 한 몸 불사르는 헌신, 그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내는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보여주었던 자기부인의 좁은 길 아니었을까.
"우리가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죽음을 애통해하거나 새로운 미래에 대해 경탄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210쪽>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장 난 지하철 4호선 이수역에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모임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 열차를 타려는 욕망 가득한 내가 보였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채, 앞사람을 밀고 있는 내가 보였다.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다음 열차를 계속 기다릴까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열차고장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구의역 사고(2016)를 떠올리지 못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 가며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던 19살 청년을 벌써 잊었다. 경영효율의 탐욕이 삼켜버린 꽃다운 청년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치욕스럽고 부끄러웠다. 아, 어찌 내 욕망의 민낯이 이것뿐이랴.
예언자적 삶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2016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 : 생명의 교육, 역사 위에 서다> '역사 - 과거 현재 미래' 공부모임이 끝나간다. 친일 독재 청산과 남북통일, 외안부 문제를 눈물로 외치셨던 이이화 선생님, 역사교육의 목적이 정의롭게 사는 것과 정의로운 인간을 길러내는 것에 있다고 말씀하셨던 김삼웅 선생님, 식민사관을 벗어나 열린 민족주의를 주창하셨던 이만열 선생님의 강의와 삶의 태도를 되새겨본다.
북경의 매서운 추위를 뚫고 누추한 골목을 헤집으며 아(我와) 비아(非我)의 역사를 기록하셨던 신채호 선생님, 민족의 고난 가운데 간절하게 뜻을 붙잡으셨던 함석헌 선생님, 그리고 국치의 역사를 애통해하시며 우리에게 민족의 혼을 불어넣으셨던 박은식 선생님, 그분들의 삶도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 이분들 모두가 대한민국의 예언자셨구나. 그 예언자들의 눈물과 죽음으로 뿌린 씨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꽃이 살아 숨 쉴 수 있었구나. 왜 역사 공부 끝자락에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야만 했는지 이제 알겠다.
역사 속 예언자의 삶을 계승하는 것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사명이다. 더 이상 왜곡된 주류문화에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가오는 19대 대선은 단순한 선거가 아니다. 그것은 주류문화를 거슬러 정의와 긍휼이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맞이할 수 있는 역사적 기회이다. 나를 비워내는 간절한 사랑으로, 정의와 긍휼이 가득한 대한민국을 상상해 본다. 애통(哀痛)으로 애(愛)통(通)하리라!
-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카페로 오시면 교육문화연구학교를 함께하고 있는 이들의 소감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바로 가기(http://cafe.daum.net/kyungdang/coIz/393)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도 기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