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0일 처음 방송된 MBC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은 지금까지의 홍길동 사극과는 크게 다르다. 소설가 허균이 만든 의적 홍길동의 이미지를 약화시키고, 드라마 제목에서부터 역적 혹은 혁명가 홍길동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또 홍길동을 정승의 서얼(서자+얼자)이 아니라 노비 남성의 아들로 설정한 것도 색달랐다. 서자는 일반인(양인) 첩이 낳은 아들이고 얼자는 노비 첩이 낳은 아들이다.
<역적> 1회 및 2회에서는 어린 홍길동이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양반 부잣집 노비로 일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당하는 차별과 학대를 지켜보며 저항 의식을 키워가는 소년 홍길동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홍길동의 어머니·아버지가 부잣집 노비였다는 설정은 역사 기록과는 상반된다. 1666년 홍만종이 편찬한 수행자들의 전기인 <해동이적>에 따르면, 홍길동은 양반 아버지를 둔 정승 홍일동의 이복동생이었다. 홍일동은 정실부인의 자식이고 길동은 첩의 자식이었다. 홍길동의 아버지는 <홍길동전>에서처럼 양반 고위층이었던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 때 나온 족보인 <만성대동보>의 남양 홍씨 편에서도 홍길동은 정3품 고위층 남성의 서얼이었다.
홍길동의 신분에 관한 드라마 <역적>의 설정은 역사기록과는 상반되지만, 홍길동을 의적이 아니라 혁명가 혹은 역적으로 설정했다는 점은 역사기록과 일치한다. 홍길동의 반란을 다룬 <연산군일기>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홍길동은 부대를 이끌고 관청을 습격하며 조선왕조에 대항한 혁명가였다. 허균의 소설은 그런 <연산군일기>의 홍길동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국가권력을 훔치는 일도 '강도'로 표현된 옛날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의적 홍길동의 한자 이름은 길할 '길'과 아이 '동'을 써서 洪吉童이고,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혁명가 홍길동의 한자 이름은 길할 '길'에 같을 '동'을 써서 洪吉同이다. 이렇게 한자 이름이 다른데도 소설 속의 홍길동이 혁명가 홍길동을 모델로 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실존인물을 소재로 소설을 쓰면서 한자를 똑같이 사용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점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홍길동전>의 홍길동과 <연산군일기>의 홍길동이 동일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는 점이다.
두 기록 속의 홍길동은 같은 시대 사람이다. 둘 다 똑같이 15세기 및 16세기 사람이다. 또 <해동이적>의 저자이자 17세기 사람인 홍만종은 실존인물 홍길동과 <홍길동전>의 홍길동을 연관지어 생각했다. 다만, 소설 속 홍길동이 도술을 부리는 장면에 대해서는 홍만종도 부정적 시각을 표출했다.
<연산군일기>에는 홍길동을 강도로 표현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홍길동을 혁명가로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뿐만 아니라 왕실의 소유물인 국가권력을 훔치는 일도 강도로 표현되었다.
'강도'가 그런 뜻으로도 쓰였다는 점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나타난다. 1911년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구는 자신이 국사(國事) 강도범이라 감옥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노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홍길동을 강도로 표현한 것은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김구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정치범이나 혁명가를 강도로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방 유지들의 지지까지 받은 특이한 혁명가
그런데 홍길동은 혁명가치고는 좀 특이한 편에 속했다. 혁명가를 포함한 정치범들은 특권층의 미움을 사기 마련인데, 홍길동은 그렇지 않았다. 서민층뿐 아니라 지방 유지들의 지지까지 받은 특이한 혁명가였다.
음력으로 연산군 6년 12월 29일자(양력 1501년 1월 18일자)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농사를 지도하는 권농, 지금의 이장에 해당하는 이정, 지방의회와 유사한 유향소의 간부들이 홍길동의 반란에 동조하거나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홍길동을 지지한 지방 유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충청도 지방 유지들이 홍길동을 가장 열렬히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중종 8년 8월 29일자(1513년 9월 27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홍길동이 체포된 지 13년이 넘도록 충청도에는 홍길동이 지나간 여파가 남아 있었다. 홍길동의 반란을 계기로 10년 넘게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던 것이다.
지방에서 세금을 내는 계층은 토지를 가진 지주층이었다.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는 것은, 충청도의 행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증거인 동시에, 충청도 지주들이 조세 징수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는 증거가 된다.
홍길동의 반란으로 인한 여파가 충청도에서 가장 심각했다는 기록과 홍길동에게 협력하는 지방 유지들이 많았다는 기록을 종합하면, 충청도 지방 유지들이 홍길동에게 가장 많이 협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농, 이정, 유향소 간부 같은 지방 유지들만 동조한 게 아니었다. 중앙정부의 고관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연산군 6년 11월 28일자(1506년 12월 18일자) <연산군일기>에는 정3품(중앙부서 국장급) 이상의 당상관인 엄귀손이 홍길동에게 협력한 일을 두고 연산군과 대신들이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홍길동의 '팬'들이 중앙 관청에도 있었던 것이다.
홍길동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장면
반체제 혁명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기 마련인 특권층이 홍길동을 지지하도록 만들 만한 두 가지 요인이 그 당시 있었다. 하나는 재정 파탄과 독재다. 연산군 시대에는 국고가 바닥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정위기가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의 독재가 심했다.
재정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는 독재자가 조세를 강압적으로 징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경우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것은 조세 부과 대상인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일 수밖에 없다. 연산군 시대의 지방 유지들이 홍길동에게 동조한 데는 이런 요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홍길동이 지주들의 심리를 고려해서 혁명 구호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특권층이 홍길동을 지지하도록 만들 만한 또 다른 요인은 연산군의 도덕성 문제였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연산군은 궁에서 향락에 젖어 있을 때가 많았다. 연회장을 만들 목적으로 도성 사방 100리의 민가들을 철거한 적도 있다.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침해하는 군주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최순실처럼 왕의 심기에 민감한 부하들을 지방에 파견해서 마음에 맞는 이성들을 선발해서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연산군은 특권층이 신봉하는 유교 이념에 맞지 않는 이단아였다. 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성인군자 같은 왕을 기대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그렇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연산군은 여론까지 무시하고 독재를 했으니, 특권층은 그를 불통의 군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도덕성이 낮은 군주가 불통 정치까지 하게 되면, 서민대중보다 특권층이 더 쉽게 분노한다. 군주의 도덕성·학력·교양을 중시하는 쪽은 아무래도 서민층보다는 특권층이다. 특권층은 도덕성 낮은 군주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불통 정치까지 하게 되면 더욱 더 참지 못한다.
홍길동이 지방 유지나 중앙 고관들까지 동조자로 만든 것은 위와 같은 두 가지 요인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15세기 후반의 상황을 이용해 서민층의 지지를 끌어내는 한편, 위와 같은 요인들을 활용해서 특권층의 지지까지 끌어냈던 것이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촛불 집회에서는 중산층이나 상류층에 맞는 구호보다는 서민층에 맞는 구호가 훨씬 더 많이 나온다. 사실, 하나의 정치집회에서 양쪽을 고루 만족시키는 구호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홍길동은 그런 일을 했다. 서민층을 부대원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상류층의 지원까지 받아냈던 것이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홍길동은 서민층과 상류층의 지지를 모두 끌어낸 흔치 않은 혁명가였다. 홍길동의 반란으로 인해 충청도에서는 10년 넘게 세금이 걷히지 않았을 정도로 그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그런 홍길동을 허균이 의적으로 묘사하는 바람에, 후세 사람들은 홍길동의 진면모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하긴, 허균이 그를 혁명가로 묘사했다면 <홍길동전>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압수가 극심해져서 오늘날의 우리한테 홍길동이 덜 친숙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