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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분홍색 표지로 된 책을 내리 세 권 읽었다. 표지 색깔로 책을 고른 것은 아니다. 연분홍색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공통점은 모두 여성의 삶에 관한 책이란 점이다.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은유 씀, 서해문집 펴냄)는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제목이 눈에 들어온 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척 복잡한 감정이 지나갔다. 우선 '싸움(싸울)'이란 단어에 긴장감이 일었다. '때마다'에선 지난한 일상이 떠올랐다. 마침내 '투명해진다'에 이르러선 꿈틀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음 한 곳에 이슬이나 눈물방울이 맺히는 것 같았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읽었다.

'저자는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면서 엄마, 아내, 딸, 노동하는 여성 등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자신을 추스르며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일상의 울분을 직시하고 그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한 여자의 분투기다.'

완전히 마음이 동했다... 이 책은 읽어야 해!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저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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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던 설이 지나고 연휴 마지막 날 책을 펴들었다. 맨 앞 '저자의 말'부터 마지막 글 '절판 기념회를 축하해도 되나요?'까지 읽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글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애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 쓰고 있었다.' - 9쪽

'집안일에서 시작된 나의 울컥은 세상일로 번졌고, 울컥이라는 존재의 딸꾹질을 글로 써서 진정시키곤 했다.' - 10쪽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집안일부터 세상일까지 나의 울컥은 생의 질문이 되었다. (중략)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무언가와 싸우며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12쪽

책은 56편의 짧은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글의 주 소재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들이다. 마트 시식코너 직원이 건넨 "고객님, 남편 안주용이나 아이들 간식용으로 좋아요"라는 말에 불쾌함을 느낀 어느 여성, 반바지를 입은 친구에게 "그렇게 짧게 입고 다니면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라고 말한 선배, "(여성은) 너희들(남성)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좀 잘 보살펴줘요"라고 한 방송인 김제동까지. 꼭 이들이 아니어도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한 번쯤 듣거나 해봤음직한 이야기들이다.

마트직원도, 선배도, 김제동도, 누군가에게 특별히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저자는 '울컥'했던 모양이다. 따옴표 속의 짧은 말 한마디는 그에게 한 편의 에세이가 되어 돌아 나온다.

마트 직원의 "남편 안주, 아이들 간식" 운운하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얼굴에 앳된 기색이 사라지고 나면 한 여성의 개체성은 상실되고 엄마나 어머니로 호명'되는, '욕망의 주체가 아닌 돌봄 노동의 대명사'로 불리는 여성들의 삶을 본다. '짧은 바지와 남편'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남편의 입장을 내면화한 말들'을 여성 스스로 재생산하고 있음에 놀란다. 또, 마치 '여성을 치켜세우고 남자를 비하하는 듯한' 김제동의 표현은 가부장제 언어를 내면화한 '권력의 말'임을 일깨운다.

수많은 '나'들이 살아가는 일상엔 이렇게 평범함으로 가장한 폭력의 언어와 억압이 난무한다. 여기에 '울컥'한 저자는, 바로 그 자리에 거울을 내밀어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그 '울컥'과 '싸움'의 기록이다.

어디 저자뿐일까. 각자 서 있는 곳이 다를 뿐, 소시민의 삶은 늘 어딘가에 치이고 부대끼기 일쑤다. 부당한 듯, 억울한 듯, 괜찮은 듯 그렇지 않은 불명확한 감정에 맥이 빠지고 지치기도 한다.

섣부른 위로와 자조는 효과가 오래 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미묘한 감정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고 내 감정을 그대로 지지하는 것. 작은 감정의 결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표현한 이 책은 멋진 응원가가 되어 주기에 충분하다.

자유기고가인 저자 은유는 학습공동체 '말과활 아카데미'에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시사in>이 진행한 설문에서 출판인들이 꼽은 '올해의 필자'로 뽑혔다. "삶과 괴리되지 않는 부드럽고 단단한 언어로 자신과 타인, 세상을 엮어 이야기하는 귀한 작가", "단어와 문장의 밀도를 보면 내공이 엄청나다. 책을 읽다 보면 주춤주춤 생각하게 된다" 같은 평을 얻었다.

책을 읽으며 가슴에 와 닿는 문장들을 노트에 적어가다가 그만 두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야기를 엮어가는 그만의 논리와 정서를 그대로 베껴 머리와 가슴에 넣어두고 싶다. 세상엔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마냥 즐겁고 평화로울 리 없는 이야기들을 이토록 날 서지 않은 언어로, 따뜻하고 섬세하게 풀어내는 능력 역시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 읽은 책을 여전히 옆에 두고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읽고 또 읽을 뿐이다. 그의 다음 책이 절로 기다려진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서해문집(2016)


태그:#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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