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극기 집회 갔다 왔다. 웃기지 마. 박정희 대통령이 밥 먹고 살게 해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네가 그 시대에 살아보기나 했어? 살아 보지도 않은 것들이 까불어."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했던 대다수 60대 이상 국민들의 논리가 이 정도 수준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지난 12일 방송된 <SBS 스페셜> '사건번호 2016헌나1'에 출연한 74세 라종임씨의 논리가 딱 그랬다.
그는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혐의에 대해서도 "친구를 믿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라고 두둔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태극기 집회도 참석했었다는 그는 촛불집회에 참석한다는 자식들과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임기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 동안을 못 참아서 탄핵을 해야 하나"거나 "전직 대통령들도 다 그렇게 빼 먹었는데"라며 박 대통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다.
"나는 내가 세월을 겪어 왔잖아요. 걔네들은 이론으로 알지만 나는 현실을 겪어 왔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기려고 하지, 그게 아니다."압권은 라종임씨와 동년배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터져 나왔다. 가장 강력한 한 방, 60대 이상 박근혜를 지지하는 국민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그 논리가 어김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박근혜가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어, 나는.""불쌍해. 남편이 있나 부모가 있나 어디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그걸 이용한 최순실이가 나쁜 거지."무엇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인 '피의자' 박근혜씨를 이다지도 오랫동안 불쌍하게 만드는가.
누가 박근혜를 불쌍하다 하는가 지난 10일 오후,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이후 박사모와 친박 단체 회원들의 격렬한 폭력 시위가 훑고 지나간 안국역 사거리 앞. 현장에서 마주친 시위 참가자 중 침통하다 못해 나라 잃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고, 적지 않은 이들이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쳤다"거나 "박근혜가 불쌍하다"고 외치며 자리를 뜨지 못했고, 또 많은 이들은 '새누리당' 입당 원서를 자필로 적고 있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파면된 후 3일간 '드라마틱'하고도 비극적인 사건들이 전개됐다. 친박 단체의 시위로 3명의 목숨이 비명횡사하는 와중에 친박 집회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불금', '탄(핵)금요일' 집회에 이어 11일에 20차 촛불집회가 축제분위기에서 성황리에 이뤄졌다. 그리고 12일 저녁, 삼성동 자택으로 향한 박근혜씨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친박 의원들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현장을 온 국민이 지켜봤다.
그 미소, 박근혜씨의 그 환한 미소가 결정적이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방문하기까지 7시간이나 걸렸던 박근혜씨. 하지만 지난 12일 청와대에서 삼성동 자택까지 걸린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대통령 당선 직후를 방불케 했던 자택 앞 지지자들의 환대와 박 대통령의 환한 미소를 두고도 "불쌍하다"고 한다면, 의미를 심각히 훼손당한 "불쌍하다"는 단어가 더 불쌍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독한 박근혜씨의 짧은 입장 전문 중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는 대목은 두고두고 '불복' 의사로 읽히고 있는 중이다. 이를 두고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혹독한 비판을 남겼다.
"국민에게 탄핵당한 죄인이 반성의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마중나온 사람들을 활짝 웃으며 대하는 것을 보니 털끝 만큼의 양심이나 수치심도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말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었는데 그래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드려야 하는 건 아닌지." 단 한 마디의 직접적인 육성 사과도 없는, 책임감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전직 대통령. 게다가 정당한 수사 절차와 법집행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고 피해온 불량한 '피의자'를 두둔하는 세력을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나.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시작일 뿐이다. 검찰의 제대로 된 수사는 이제부터다. 아직도 '피의자' 박근혜씨가 불쌍하다고 여기는, 당신은 누구인가.
'호위무사' 김진태, 그의 대선 출마선언문이 가리키는 것"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상처를 어루만져드리겠습니다.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역사에서 진실을 밝히겠습니다. 그 누구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저는 태극기 시민들의 눈물과 좌절을 처음부터 함께했던 사람입니다. 온몸으로 특검 연장을 막아내기도 했습니다."오늘(14일) 오전, 대선출마를 선언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의 출마선언 중 첫 번째 이유다.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라는 대목에서 '호위무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다. 문단 전체가 '불복'을 시사하는 동시에 "특검 연장"까지 반대하고 있다.
김 의원은 그러면서 자유당 대선후보로 선출되면 "분열된 애국보수를 재건하겠습니다"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우뚝 세우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내걸었다. 그 중 '자유민주주의' 대목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민노총, 전교조로 나라는 좌경화되고 있습니다. 폭력시위도중 사망한 백남기씨는 기억하면서 태극기 집회에서 분사한 세 분의 열사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는 전국 중고교 중 단 한 곳에서만 채택됐습니다. 저는 통진당 이석기를 국회에서 처음 공론화해 몰아냈습니다. 국회 법사위에서 보수의 두 축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에 어긋나는 악법을 무수히 막아왔습니다. 자유와 법치가 숨 쉬는 제대로 된 나라 만들겠습니다." 해외 원정까지 나서며 '태극기 집회'에 참석했던 김진태 의원의 속내야말로 '친박' 정치인들의 말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끝끝내 기댈 곳은 레드콤플렉스와 안보상업주의 뿐이다. 5060 세대의 '박정희 향수'와 레드콤플렉스, 기울어지고 왜곡된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낡은 수사의 폐해는 이미 박근혜씨 스스로가 입증해냈다. 그것도 모자라 혈세를 낭비한 '관제데모'로 여론의 장을 심각하게 훼손시킨 것 역시 박근혜씨와 친박들이다. '박근혜 파면' 이후 건전한 보수까지 좀 먹는 그들을 끝까지 좌시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박근혜씨가 아직도 불쌍한가 다시 묻자. 박근혜씨가 아직도 불쌍한가. '호위무사'들이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충성을 맹세하는 중이다. 그 호위무사들이 벌써부터 '삼성동계'라 불릴 태세다. 수십 억대로 알려진 삼성동 자택은 물론 특검이 '경제공동체'로 규정한 최순실씨 일가의 재산,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산이면서 국민들의 혈세라 할 만한)의 재산 역시 박근혜씨가 소유 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박근혜씨가 자꾸 불쌍하다고 한다. 이럴 때만 끼어드는 "자식도, 남편도 없다"며 생물학적인 젠더를 들이대는 일이야말로 한국 최초 '여성대통령'이란 수사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다.
더군다나 측근인 조원진 자유한국당 의원은 13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연신 "거실이 너무 춥다"고 유난을 떨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말 그대로 풍찬노숙을 했던 세월호 가족들도, 광화문 텐트촌을 차린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들도, 한겨울에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던 국민들도 너무 추웠다. 모두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가 관여하고 주도한 무능과 범죄로 인해 떨어야 했던 사람들이다.
박근혜씨는 불쌍하지 않다. 박근혜씨는 단 한 번도 피해자인 적이 없다. 고 육영수 여사 사후에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권력을 누렸고, 1979년 이후에도 영남대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하며 호가호위했다. 불쌍하기는커녕 여전히 가진 것 많은 행복한 인간이다.
그렇다. 이제는, 이제야말로 인간 박근혜와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를 철저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야만 진정하게 '박정희 체제'와 결별할 수 있다. 또 그에 기생한 세력들을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에서 분리시킬 수 있다.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이 남긴 무겁고도 당면한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