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 초면 학교마다 이런저런 장학금을 주겠다는 기관들의 공문이 쇄도한다. 학교에서는 장학금 지급과 같은 여러 기관의 사회 공헌 활동을 사회가 학교 교육에 보내는 신뢰와 격려의 메시지로 여긴다. 경제 상황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고는 하나, 액수가 다소 줄어들지언정 적어도 장학금의 수와 종류는 예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해 다행스럽기만 하다.
기꺼운 마음이지만, 경쟁률도 높고 조건도 까다로운 데다 기한조차 빠듯해 학년 초 아이들의 면면을 파악해 선정하고 서류를 챙겨 보고하는 일이 담임교사로선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렇다고 신청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한 푼의 장학금이 아쉬운 가정의 아이들이 학급마다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학원비는커녕 수업시간에 쓸 참고서와 문제집을 마련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 가정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선지 장학금 수혜 대상자 선정을 두고 학년과 학급별로 순번을 정하는 것이 언제부턴가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은 학비라기보다 생계비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학금은 여전히 '성적 우수자'를 첫 번째 자격 기준에 올려두고 있다. 아예 내신 등급이나 상위 몇 퍼센트로 수치를 명시해 신청 조건으로 못 박은 경우도 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배려하겠다는 경우라도 반영 비율에서는 성적을 중시하는 관행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학금을 받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장학'이란 본디 공부나 학문을 장려하고 돕는다는 뜻이다. 곧, 장학금은 공부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뜻을 펼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본뜻에 훨씬 부합한다고 하겠다. 최근 고려대학교가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지급한 '성적 장학금'을 폐지하고, 대신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생활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장학금의 '효능' 측면에서도 저소득층에게 우선 지급되는 것이 타당하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동기 부여는 될지언정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가난한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공부 자체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릴 수도 있다. 전자가 보상의 성격이라면, 후자는 공부에 관한 한 사활이 걸린 문제다.
그렇다고 받는 입장에서 주는 기관을 향해 자격 기준을 바꾸거나 완화해달라고 대놓고 요구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들 장학 재단 나름의 설립 취지와 운영 기준이 있을 텐데, 그걸 학교가 나서서 문제 삼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저 그들이 제시한 조건에 부합하는 아이를 찾아 기한에 맞춰 추천하는 것이 '을'의 입장인 학교가 해야 할 '유일한' 몫이다.
장학금 신청 서류, 지나치게 많아장학금의 조건과 기준이야 어떻든 학교의 입장에서 말 그대로 '다다익선'이다. 무상 교육처럼 느낄 수 있도록 모든 아이들이 장학금 혜택을 고루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욕심마저 든다. 문제는 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진 조건을 내건 장학금이 적지 않다는 것과, 신청할 때 학교와 학부모가 제출해야 할 서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를 위한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학교든 학부모든 신청 과정에서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우선, 아무리 지원 금액이 크다 해도 수혜 대상자를 찾을 수 없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다. 예컨대, 한 장학금은 '내신 성적 상위 10% 이내'와 '건강보험료 월 12만 원 이하(직장 가입자, 4인 가족, 부모 합산 소득 기준)'라는 두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에만 추천이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거칠게 말해서, 기초수급자나 차상위계층 가정의 최상위권 학생이라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자녀의 성적이 부모의 경제력과 정확히 비례하는 현실에서, 이에 부합하는 아이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만약 아이들의 성적에 따른 석차를 오름차순으로 배열하면, 그것이 곧 부모의 경제력 서열이라는 '웃픈' 이야기도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경우, 다행히도 300여 명 중에 딱 한 명이 있었다. 결국, 대상자 선정 과정이 사실상 필요 없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상금'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자격 기준이 느슨해 대상자 규모는 크지만 최종 선정 인원이 한두 명에 불과한 장학금도 있다. 그나마 지원 금액이 많지 않으면 대개는 포기하고 마는데, 그런 까닭에 '희망 고문' 장학금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출할 서류를 챙기면서도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건 아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내 신청할지 말지 여부를 고민하기 일쑤다.
무엇보다 제출해야 할 서류가 정말 많다. 이 서류를 일일이 다 들여다보긴 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일단 학교에선 소정의 장학금 신청서와 학교장 추천서, 타장학금 수혜 여부 확인서, 자기소개서, 전 학년도 학교생활기록부 및 전체 석차가 표기된 성적 증명서 등을 챙겨야 한다. 여기에다 일부 장학금의 경우엔 담임교사 추천서를 따로 요구하기도 한다.
이러한 서류들을 빈틈없이 챙겨야 하는 담임교사의 입장에서는 기꺼워해야 할 장학금 관련 업무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상담을 통해 대상 학생의 면면을 파악하는 것조차 그렇잖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학년 초에는 더욱 부담이 된다. 기한에 쫓겨 형식적으로 추천서를 쓰는 경우가 허다한 까닭이다. 다급하면 기존의 내용에다 대상자의 이름만 바꿔 제출하는 사례도 있다.
앞서 말한 기초수급자 가정의 최상위권 학생을 요구하는 장학금의 경우에는, 솔직히 말해서, 죄다 '불필요한' 서류일 수밖에 없다. 학교마다 대상 학생을 찾기조차 힘든 마당에, 어느 교사가 추천서 쓰기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저 성적 증명서와 건강보험료 영수증만 확인하면 될 일이다.
모멸감 견뎌야 받을 수 있는 장학금그나마 학교에서는 번거로움만 감수하면 되지만, 추천된 아이와 그의 부모는 어떻게든 장학금을 받기 위해 최소한의 '모멸감'을 견뎌내야 한다. 아이가 써야 하는 자기소개서에는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꿋꿋이 환경을 극복하며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는 두 가지 내용이 감동적으로 기재되어야 한다. 장학금과 관련된 자기소개서라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레퍼토리'다.
그의 부모가 이겨내야 하는 스트레스는 더하다. 주민등록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소득증명원, 건강보험료 납부확인서, 세목별 과세 증명서 등을 학교에 제출해야 한다. 주민자치센터에서 발급하는 주민등록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외하면 모두 남들 앞에서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서류들이다.
범용 공인인증서가 없다면, 주민자치센터와 세무서, 건강보험공단, 시군구청 등을 돌아다니며 각각 따로 발급받아야 한다. 만약 부모에게 장애가 있거나 의사소통이 어려운 다문화 가정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을 아이가 대신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아이와 부모를 대신해 담임교사가 발 벗고 나설 수도 없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당사자가 아니면 서류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학교에선 소액의 급식비 지원 사실조차 다른 친구들이 알 수 없도록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다. 하물며 장학금을 받기 위해선 '가난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증명해야' 한다면, 아이의 학교생활을 돕겠다는 장학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종국에 '모멸감'과 맞바꾼 장학금이 장차 아이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든다.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는 마당에, 어쩌면 한낱 장학금마다 내건 기준과 조건에 몽니 부리고 토를 다는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장학금 공문을 만지작거리며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이른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져가는 시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장학금이 쓰이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적어도 장학금은 결과에 대한 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릇 교육이란, '만 명을 먹여 살리는 1명의 엘리트'나 '될 성부른 나무의 떡잎'에 주목하기보다,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억눌려진 아이들의 잠재력을 발현시키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장학금도 교육의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