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박지원 대변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에 박지원 국민의 당 대표가 낸 책 <넥타이 잘 매는 남자> 추천서에 이렇게 썼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성사의 1등 공신이었고, 광폭의 정보 수집력과 정치적 감각으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무총리·장관 후보자 8명을 낙마시키기도 했다. 당 원내대표를 세 번이나 맡은 것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숱한 동교동 가신들을 이겨내고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잡았다. 이 같은 발군의 역량 덕분에 그는 김종인 전 의원과 함께 정치9단으로 불렸다.
2015년 당 대표 경선부터 시작된 '문재인 공격'"코끼리를 바늘로 찔러서 죽게 하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찌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우리는 우병우 사건에 적용하겠다."국민의당 원내대표 시절인 지난해 8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대로 그는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론했다. 끝내 구속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우병우의 몰락'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박 대표가 최근 총력을 기울여 '죽을 때까지 계속 찌르는 대상'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다.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거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 대표는 대의원 지지도가 약한 문 후보 측이 선거를 불과 6일 남긴 상황에서 불공정하게 경선룰을 바꿨다며 문 후보 측을 맹비난했고, 결국 3.5% 차이로 문 후보에게 패했다.
2016년 2월 국민의당 창당 이후에도 '문재인 공격'은 계속됐고, 19대 대선이 본격화되면서 국민의당의 '문모닝'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경쟁 대상인 야당, 특히 야권의 심장인 호남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라는 점에서 문 후보 비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한국 대선이 '승자 독식'이라는 점에서 이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5년 전 "호남의 아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3번째 기적을"
하지만 박 대표는 선을 넘어가고 있다. 그는 19대 대선 공식선거운동 첫날인 17일 전북 전주 유세에서 "문재인은 대북송금 특검을 해서 우리 김대중 대통령을 완전히 골로 보냈다"고 했다. '문재인 대북송금 특검 책임론'이라는 단골메뉴에, '골로 보냈다'는 극도로 자극적인 표현까지 덧붙였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안철수 후보의 선거포스터에 국민의당 당명이 빠져 있다는 더불어 민주당의 비판을 반박하면서 "자기들 포스터에는 왜 '부산대통령' '부산정권'이란 표시가 없죠"라고도 했다. 이 둘을 묶어보면 그가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난 2012년 대선 때와 비교해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박 대표는 문 후보를 '호남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3번째 기적을 광주로부터'라고 강조했다.
또 지역 유세를 다니면서 "문 후보는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생활해 오는 등 30년간 민주주의, 노동자, 인권, 서민을 위해 살아온 국정경험을 가진 훌륭한 후보다, 앞으로 세상과 경제를 바꿔나갈 문 후보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2012년 11월 27일 광주 유세에서도 "문재인 후보는 야권단일후보이고 5년간의 국정경험, 127명의 국회의원과 전국 조직,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주당 후보로 모든 것을 갖췄다"고 치켜세웠다.
그런데 그런 '호남의 아들'이 5년도 채 안 돼 '호남을 차별'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골로 보낸' 인사가 돼 버린 것이다.
박 대표는 지난 10일에는 "국민은 노무현 대통령은 존경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싫어한다"며 "문재인 후보를 찍으면 도로 노무현 정권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대북송금 사건, 노무현 정권 모두 2012년 대선 이전박 대표가 "김대중 대통령을 골로 보냈다"라고 했던 대북송금 사건은 2012년 대선보다 훨씬 이전인 2003년 사건이었고, 노무현 정권도 2008년에 마감했다. 그렇다면 2012년 대선때는 무슨 생각으로 문 후보를 지지했던 것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는 수많은 과오가 있고, 문재인 후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누구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때 당 원내대표로서 문 후보를 적극 지지했던 박 대표가 그를 비판하려면 사전 절차가 있어야 한다. 박 대표의 정치적 무게에 걸맞게 "당시에는 사람을 잘못 봤다,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국민들에게 잘못된 후보를 추천했다"고 사과부터 해야 한다.
박 대표는 안철수 후보가 문 후보보다 월등한 대통령감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또 정치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그럼에도 5년 전과는 정반대로 해석해 "문재인을 찍으면 도로 노무현 정권"이라고 하거나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방식은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것 외에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