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 문 후보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홍준표 : 문 후보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유승민 : 문 후보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심상정 : 문 후보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사회자 : 문재인 후보 시간 다 됐습니다.문재인 : ?어느 트위터 사용자의 KBS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 관전평이다. 맞다. 19일 생방송 된 토론회는 지지율 1위 '문재인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 여기에 사회자의 발언을 하나 더 추가해야 옳다. 후보들에게 질문·답변 시간과 상관없이 9분을 주는 '시간 총량제'를 도입한 KBS는 이 토론회의 숨겨진 승자였다. 그리하여,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사회자는 이러한 유행어를 남겼다.
"홍준표 후보님, 시간이 많이 남으셨는데요."방송 전 각 캠프가 촉각을 세웠던 '스탠딩 토론'은 KBS가 카메라로 '미디엄 샷'만 보여주면서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다. '도대체 토론은 왜 서서 한 거냐'는 반응 일색이었다. 너도나도 "문 후보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를 연발했고, 소외(?)됐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홍 후보는 "대북송금"이든 "주적", "햇볕 정책"이든 하고 싶었던 색깔론을 난사했다. 물론 초반부터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도 이 안보 몰이에 동참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치 10년 전 토론회인 듯,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와 국민의정부 10년의 평가를 홀로 짊어져야 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까지 홍준표 후보가 처음 거론한 '국가보안법' 이슈에 숟가락을 얹으며 '문재인 때리기'에 동참했다. 그 자리에 파면된 대통령과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의 평가는 온데간데없었다. 질문 공세에 시달리던 문 후보로서는 매서운 '검증쇼'를 치러낸 셈이다.
"참 의미 없는 토론을 한다."토론 말미, 홍 후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일각에서 "TV 토론이 향후 지지율 변화를 견인할 것"이란 보도가 파다했지만, 이날 KBS 토론은 지난 SBS 토론과 달리 전반적인 토론 수준 저하로 인해 '정치 피로감'만 더 했다는 반응도 지배적이다. KBS 토론회는 이미 1위 때리기가 예견 가운데 질문과 답변에 대한 사회자의 조율이 전혀 없이 '시간 총량제'만 강조됐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후보들 중 다수는 자기 표가 어디가 있는지, 그 표를 어디서 뺏어 올 수 있는지, 자기 이미지를 어떻게 포장해야 하는지 전혀 분석이 안 된 걸로 보였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제 할 말을 다했고(홍준표), 불리한 4:1 토론에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고(문재인), 심정적 지지자들의 이탈을 초래하는 듯 보였다(심상정). 26.4%(닐슨 코리아 기준)이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이날 토론회. 최종 승자인 KBS와 함께 자기 표를 확실히 챙긴 후보는 누구였을까.
'문재인 청문회'의 주인공 문재인
"나라를 이렇게 망쳐놓고 언제까지 색깔론으로 정치를 할 겁니까." 지난 토론에서 온화한 미소로 일관했던 문재인 후보는 홍준표 후보의 집요한 색깔론 공격에 종종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토론이었다. 문재인 외 4명 모두가 문재인을 연호했고, 문재인만 바라봤다. 특히 홍준표·유승민 후보는 사상 검증을 하려는 듯 민주정부의 대북송금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압권은 유승민 후보의 "북한이 우리 주적이냐"는 질문이었다. 문 후보의 "그런 규정은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아니다"라는 답은 그나마 기존 극우나 보수와 결을 달리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색깔론에 좀 더 단호하게 대처했어야 했다는 반응들이 적지 않았다. 반면 안철수 후보의 극렬 지지자들에 대한 질문에 '무시'하는 투로 넘어간 것에 대한 지적도 일었다. 그러니까, 보수 후보들의 철 지난 이념 공격에 대해 좀 더 확실하고 화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과 이전부터 지적됐던 매끄러운 토론 실력에 대한 아쉬움이 더해졌다. 동시에 설핏 네거티브 공세에 짜증이 나는 듯한 반응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론 선방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이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지적한 것도 문재인 후보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후보와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고 있는 만큼, 1위에 대한 공격은 매서웠다. 그러나 모든 후보들의 파상 공세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 자체로 동정표와 지지층 결집을 끌어낼 만했다. 토론 직후 이뤄질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에 흔들림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스트롱맨' 홍준표는 '나이롱맨'? "내 이정희 보는 것 같네. 주적은 저깁니다." 막말은 그대로인데, 수위와 톤이 조금 내려갔다. 그럼에도 홍준표는 홍준표였다. '대북송금'부터 '국가보안법'까지, 마치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것도 홍 후보였다. 급기야 독재자라는 뜻의 '스트롱맨'을 연호하다 심상정 후보에게 "나이롱맨"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KBS가 만들어 놓은 룰의 수혜자도 홍 후보였다.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으니 시간이 가장 남았다. 그 시간을 문재인·안철수 공격에 맘껏 할애했다. 문재인 후보에게는 "노무현 대통령이 640만 달러 안 받았다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습니까"라는 색깔론 질문을 퍼부었고, 안철수 후보에게는 '박지원 상왕론'을 제기했다.
막말이나 색깔론, 토론 수준을 떠나서 아마 이날 토론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자기 지지층을 결집시킨 후보를 꼽으라면 단연 홍 후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막말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토론 말미, 안 후보가 "설거지가 여성의 몫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성 비하 아닙니까?"라며 홍 후보의 인터뷰 발언을 문제 삼았고, 심 후보도 "여성을 종이라고 보지 않고서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과하십시오"라고 몰아 붙였다. 결국 홍 후보는 "세게 보이려고 그랬습니다", "집에서 설거지한다"라 웃음으로 무마했다. '스트롱맨'이 '나이롱맨'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성난' 안철수는 없었다, 그러나 존재감이...
"나이키 운동화에 나이키가 있습니까."홍 후보가 논란이 됐던 벽보 포스터에 대해 묻자 안 후보는 이런 예를 들었다. 이 말은 지난 17일, 이 포스터 작업에 참여했다는 광고인 이제석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난 토론에서 보았던 '성난' 안철수는 없었다. 경직된 모습도 많이 줄었다. 시작부터 "왜 3번은 없느냐"며 농담을 던질 만큼 유한 모습을 준비한 듯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든 준비해 온 질문과 답변을 뱉어내고야 말겠다는 모범생 스타일은 이날 토론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표를 뺏어 와야 하는 문 후보와의 토론이 대표적이었다. 작심한 듯 문 후보에게 '적폐세력'에 대한 표현을 묻는 듯했지만, 기이하게도 항변과 질문을 유승민 후보에게 돌렸다. 유 후보는 "지금 저보고 물으시는 거예요? 문재인 후보를 디스(비판)하시면서... "라며 황당해했다. 문 후보는 이에 "국민을 적폐세력이라고 이렇게 제 이야기를 오독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런 게 적반하장"이라는 안 후보의 답이 궁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으로, 보수표를 가져와야 하는 안 후보는 유 후보에게도 날 선 공격을 받았다. '유치원 발언' 등 안 후보의 아킬레스건으로 등극한 교육문제에 대해 유 후보는 "안 후보는 혹시 자제분이 얼마나 한국에서 교육받았나"라며 학제개편이나 교육부 폐지에 관해 물었다. 안 후보의 자세한 설명에도 "잘 이해가 안 된다"며 문 후보까지 가세했다. '문재인표'와 '보수표'를 동시에 가져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안 후보의 난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태세 전환 유승민, 북한 주적 질문이라니 "북한이 우리 주적이냐."이전 토론에서 봤던, '교수님' 유승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초반부터 전술핵 배치나 사드, 북핵 문제에 대해 강하게 치고 나갔다. 경제 일변도로 나갔던 지난 토론과 달리 안보외교통일 문제에 유달리 센 목소리로 일관했다. 지난 토론에서 호평을 받았던 자신감의 일환이었을까. 아니면 그 호평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 데 대한 조바심이었을까.
일각에서 '보수의 희망'이란 평가까지 받았던 유 후보는 이날 홍 후보의 색깔론과 '강성보수', '안보전문가' 사이를 갈팡질팡했다. 그의 입에서 "북한이 우리 주적이냐"는 문 후보를 향한 질문이 나왔을 때, 소셜미디어 등 실시간 타임라인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지난 토론에서 '합리적 보수' 이미지를 고수했던 유 후보는 이날 작정한 듯 강성 보수 이미지를 어필했다.
그의 지지층이나 정체성이 '스트롱맨' 홍준표 후보보다 안철수 후보와 겹친다는 것은 이미 정설에 가깝다. 그런 유 후보가 색깔론에 가까운 공격형 토론으로 이미지를 확 바꿨다. 결과적으로, 유 후보에게 이런 태세 전환은 독일까, 약일까.
'군계일학' 심상정, 왜 진보정당인가
"도대체 대북송금이 몇 년 지난 이야기입니까. 매 선거 때마다 대북송금을 아직도 우려먹느냐고 국민들이 실망할 겁니다." 심상정의 칼날은 한층 더 매서웠다. 경상도 출신 남성 후보 넷을 매섭게 몰아치는 유일한 여성 후보 심상정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홍 후보에게는 "나이롱맨"이라는 별명을 선사했고, 문 후보에게는 "국가보안법 폐지할 거냐"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여야 가리지 않는 진보정당 후보의 모두 까기 전략이었다.
하지만, 토론에서는 승리했을지 모르지만, 그 승리가 유의미한 지지율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문 후보에 대한 매서운 공격에 당장 '범진보'에 해당하는 문 후보 지지층이 반발하는 중이다. 심 후보의 지지율 변화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모두 까기'에 열중한 만큼 자신의 정책이 무엇인지, 왜 "할 말은 하는" 후보 심상정 외에 '왜 진보정당인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심 후보까지 문재인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었는지 묻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심상정 후보의 활약한 분명 군계일학이었지만, 향후 토론회에서 '모두까지' 외에 자신과 진보정당의 긍정성을 어필할 수 있는 전략을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