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존중받는 삶을 산다고 느끼기 어려운 시대다. 청년 실업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청년들은 자신의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벽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다. 부모 세대가 누린 경제 성장을 다시 누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 집 마련이나 결혼은 생각하기도 어렵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 어려운 시대다.
그런 청년에게 왜 노력을 더 하지 않느냐, 너만 힘든 것이 아니다, 편한 일자리만 찾지 마라, 우리도 힘들었다고 말하는 대신, 기성세대가 청년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더 제대로 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전에는 정치인이었고, 이제는 낙선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일했던 노동 전문가 은수미 전 의원이다.
은수미 전 의원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3번으로 당선됐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지낸 후 영입되었다.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반대 의견을 10시간이 넘도록 외쳤다. 진보적인 입장에 서서 노동 의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성남 중원구에 출마했지만 새누리당 신상진 후보에게 패했다.
<은수미의 희망마중>은 이제는 전 국회의원이 된 은수미가, 자신이 느끼고 겪은 바, 앞으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생각하며 쓴 책이다. 저자가 말하는 한국은 불안한 곳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다. 특히 이런 문제는 노동과 관련하여, 불안한 삶이 늘어나면서 악화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의자 뺏기 게임이다. 모두가 정해진 시간에 동시에 의자에 앉아야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자 개수는 줄어들고, 누군가는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고 지쳐가는 게임이 성립한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에서도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이 반복된다.
이렇게 불안한 삶이 늘어나도 나라로부터 보호받기는 쉽지 않다. 파견과 하청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불법 파견을 통해서 법망을 피하는 경우도 많다. 근로자와 유사한 일을 해도 근로자가 아니고, 개인 사업자로 일하는 사람은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버는 돈은 적더라도 사회보험이나 복지가 보완해준다면 숨이 턱에 찼을 때 한숨 돌릴 여유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어떤 사회 안전망의 보호도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이 최소 300만 명을 넘는다. 이들을 위한 안전망 설치에 드는 비용이 1조 7천억 정도인데 1년 예산이 400조에 달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도 하지 않는다. -59P저자는 87년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아웃소싱과 같은 제도가 만들어진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제는 일을 해도 불안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세상은 정부가 시민들을 보호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세상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권과 인간 존엄성의 보호가 민주공화국의 핵심 가치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도 내고 함께 살면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보호받는 게 시민의 권리이고 보호하는 게 정부의 의무이다. 이것이 우리가 독재나 노예제 사회가 아닌 민주공화국을 지지하는 이유이다.' -209P시민이 시민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기본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시민이 될 수 있는 최저선, 시민권을 보장하는 기준선인 국민기본선을 실제적인 삶의 규칙으로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1년에 2285시간을 일하며 OECD 기준 노동시간 최상위를 달리는 한국의 노동시간을 조정해야 한다고 한다. 하루 8시간, 1주 5일 근무를 통해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노동 효율이 높아지고, 생산성도 올라가므로 중장기적으로는 임금이 늘어난다. 당장에 줄어드는 임금은 정부 지원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누구나 일을 하면 최저임금을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으로 보장된 최저임금에 대해 언급하는 까닭은, 그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이 200만 명이나 되고, 임금체불을 겪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3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최저임금 이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저지해 영세 사업주를 살리는 정책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들이 더 많이 사회보험을 활용할 수 있는 나라, 비정규직도 노조 가입이 가능한 나라, 산재 사망률이 지금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이것이 노동 전문가이자 정치인인 은수미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청사진이다.
물론 아직 이 모든 일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정치인 은수미는 촛불에 진 빚을 정치인들이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당과 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이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상승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두 배 이상 잘한 것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의견이다. 그동안 시민들이 충분히 노력하고 도와주었으니 이제는 정치가 자신의 몫을 할 차례다.
이 책은 주제가 상이한 여러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장마다 분량이 달라 산만한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정치권이 시민이 냈던 용기의 반이라도 발휘해서, 저녁이 있는 삶을 살며 희망을 마중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마음은 책의 전체를 관통한다. 이 책은 정치인 은수미가 말하는 자신이 정치를 하는 이유이자, 나라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에 대한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