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의 6.17%는 각자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차피 안 될 심상정의 예상된 패배'일 것이고, 두 자릿수 지지율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약간은 아쉬운 결과일 것이다. 누군가는 1987년 이후 진보 정당 후보로는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는 점을 유의미하다 평가할 것이고, 정권 교체에 가장 큰 의의를 둔 누군가는 그의 득표율에서 어떠한 징후도 찾아내지 못할 수 있겠다.
200만의 유권자들은,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 5번 심상정 후보에게 한 표를 안겼다. 이는 그저 '문재인의 당선으로 정권교체가 확실해 보이니, 안심하고 심상정을 찍자'의 차원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번 대선 과정에서 심상정이 선사한 몇 가지 순간들에 대한 유권자의 분명한 응답이었다.
이들이 기억하는 '심상정의 순간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대통령 탄핵 이후 치러지는 이 특별한 선거에서, 심상정과 정의당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심 후보가 만들어낸 몇 가지 풍경들에서, 진보의 편에 서고자 하는 정치인의 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상정의 순간 ①] 2월 28일. JTBC <뉴스룸> 인터뷰손석희 앵커 (아래 '손') : "이번이 세 번째 도전이시거든요. 끝까지 가실 거죠?"심상정 후보 (아래 '심') : "끝까지 완주를 해야 대통령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손 : "냉정하게 보면, 당선 가능성과는 현실적으로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럼에도 출마하시는 이유는 뭐라고 여쭐까요."심 : "왜 이렇게 단정하십니까."손 : "죄송합니다. 질문 취소하겠습니다."심 : "저는 물론 여섯 석의 작은 정당으로 단독 집권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민주정치에서의 선거는 당선자를 확정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지요. 선거 과정에서 다양한 유권자들의 이해와 요구가 들어오고 뒤섞이고, 그렇게 큰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 선거과정에서 제시된 여러 요구와 이해관계의 합성물이 당선자이지요. 저는 헌정 사상 최초로 '친노동 개혁정부' 수립을 목표로 출마를 했고, 이번 대선에서 선전해서 꼭 관철시키겠습니다."
출마에 대한 '의아함'은, 선거 기간 내내 심상정 후보를 따라다녔다. 심 후보는 1월 20일 후보들 중 가장 먼저 출마선언을 했지만, 선거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의심을 거둬내기 힘들었다. JTBC <뉴스룸>의 손석희 앵커마저도 심 후보의 출마에 의구심을 표했다. 이날 손 앵커가 심 후보에 건넨 질문을 거칠게 전달하자면, "어차피 안 될 텐데 왜 나오냐"였다.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손 앵커도 이를 깨닫고 곧바로 사과했지만), 심상정은 담담히 답변을 이어갔다. 심 후보는 민주 사회에서 선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부터 차근히 되짚으며, 소수정당 존재 의미를 공표했다. 정말 새로운 환경에서 치러지는 이 선거에서, 정권 교체의 성격을 좌우하는 캐스팅 보트를 쥔 정의당은 자신들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국회에서 불과 여섯 의석을 차지하는 이 작은 정당은, 이번 대선 과정을 함께 밟으며 그간 자신들이 집중해온 노동자, 여성, 빈곤층, 청년, 동물 등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의제에 자신들의 시각을 입혀 공론화했다. 좌파적이라 여겨졌던 의제들을 대중적 화법으로 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듯 선거 내내 정의당은 왼쪽의 의제를 던짐으로써 건강한 견제자의 역할을 해냈고, 결과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은 건강하고 강력한 견제자를 얻게 됐다. 통합의 가치를 내세운 문 대통령은, 그 정부를 이끌어가는 과정 속에서 '분명하게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이번 선거에서처럼 심 후보가 보여준 진보정당의 강력한 견제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정부는 나태해지지 않을 것이다.
심 후보는 10일 오전 0시 20분경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임 대통령 앞에 막중한 과제가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셨습니다. 국민들이 신임 대통령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촛불의 열망을 받아 안는 성공한 개혁 대통령이 되시길 바랍니다."문재인 후보의 당선과 심상정 후보의 득표율의 뭉근한 병치는, 이전의 한국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심상정의 순간 ②] 3월 26일, 정의당 19대 대선승리 전진대회 연설"진보정당은 80·90년대 청년들이 2000년대에 만든 정당이었습니다. 이제 그때에 우리 같은 청년들은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두 구세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꿔왔던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은, 그 꿈은 결코 낡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당원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우리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만 남겨두고 모든 것을 바꿉시다. 서로 다른 생각과 방법을 승인합시다. 우리를 단결시키지 못하고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사고방식을 버립시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당을 현대적으로 개편해갑시다. 동의하십니까?"
심상정은, '가치'를 일상적으로 논하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심상정은 대선 기간 내내 독보적이었다. 정치 공학과 당선 여부의 주판을 튕기다 보면, 대개 추구하고자 하는 신념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당선권에 모여 있던 후보들은 이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잃은 듯 보였다. 대부분의 의제에서 전략적 중립의 태도를 취하면서, 가치에 대한 논의는 뒷전으로 미뤘다. '시대정신에 맞는 어떠한 신념을 지니고 나아갈 것이며,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안은 무엇이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현실성 없는 소리'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 후보는 연설과 토론에서,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를 일상적으로 언급하며 이를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심 후보의 언변이 돋보이는 여러 연설 중 하나를 꼽자면, 지난 3월 26일의 '청년들에게 정의당을 내어줍시다'라는 연설이 눈길을 끈다. 이날 심 후보는 민주, 평등, 다원, 변화 등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연설문에 진하게 녹여내어 듣는 이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민주주의의 더 깊은 정착, 세대 간의 유연한 대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통합과 변화. 심 후보는 짧은 연설에서 이 모두를 세련되게 풀어내며 정치인으로서의 가치 지향적 행보를 묵묵히 걸어나갔다.
정치인은 가치를 먹고 사는 직업이며, 그 가치를 잃는 순간 죽어버린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 멍청한 이상주의자 취급을 받는 사회에서, 그는 누구보다 당당한 대선 후보였다.
[심상정의 순간 ③] 4월 20일, 2차 대선 TV 토론회(민주 정부 10년 동안의 노동 정책을 비판하며) 심 :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인데, 노동자들의 삶은 최악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장시간 노동하고, 비정규직 가장 많고, 저임금 노동자 비중도 높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의 처지가 왜 이렇게 참담하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문 : "노동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은 것이죠. 앞으로 다음 정부는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심 : "김대중 정부 때 정리해고법, 파견법 만들어졌죠. 노무현 정부 때 이른바 비정규직법 만들어졌죠. 지난 SBS 토론 때 지적을 드렸던 것처럼, 휴일 근로를 주 40시간제에 포함시키지 않아서 68시간 장시간 노동을 허용했단 말입니다. 그것도 2000년도에 그 지침이 나왔고, 참여정부 때도 시정되지 않았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저는 민주 정부 10년 동안 제정된 이 악법들이 장시간 저임금 노동 현실을 크게 규정했다고 생각해요.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잘하겠다, 이렇게 하시면 되는 겁니까? 법인세도 뚜렷하지 않고, 정리해고 요건 강화에도 입장을 유보하고 계세요.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크게 느끼신다면 그것을 더 극복하기 위한 제안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심상정 후보는, 이날 토론회 이후 엄청난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했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자들과 일부 정의당 당원들이 그 비난의 진원지였다. 그들의 비난을 요약하자면 "왜 '같은 편'인 문재인과 공동 전선을 펴지 않고 그를 비판하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진보의 편에 선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만들었다. 문 후보와 심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후보들이었으나, 그 색채와 방향성에선 다른 점이 많았다. 문 후보는 우클릭을, 심 후보는 좌클릭을 하며 그 간격은 커졌지만, 좁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 지지자들은 이 둘을 '같은 편'이라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며, 심상정으로 하여금 문 후보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심 후보는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자신의 이념을 충분히 적셔낸 시대적 과제를 짊어진 대선 후보였고, 문재인의 조력자 역할을 해낼 의무는 당연히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오래간만의 진보정권이 성공하길 바란다면, 이전 진보정권에 대한 검토와 비판적 탐구정신의 표출은 필수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노무현만큼만'이 아니라 '노무현 보다 더 잘'해내야 하는 것이 민주화 이후 세 번째 진보정부에게 주어질 책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심상정은 과거의 실패를 기반으로 진보의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인임이 분명했다. 심상정은 진보의 편에 선 정치인이지만, 진보의 실패를 덤덤히 직면하는 것에 능한 모습을 보여 인상을 남겼다.
나아가 심 후보는 문 후보를 돕지 않았다며 비난을 쏟아내는 일부 당원들에 속상함을 느낄 법도 했겠지만, 이를 의연하게 대처했다. 토론회 다음 날 후보는 "원래 대통령 선거는 국민 대토론의 장이고, 당 밖이나 안으로나 후속토론이 이뤄지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과정을 통해 정의당은 아주 단단해 질 것입니다. 향후 토론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누구든지 심상정의 철학과 정의당의 소신을 가지고 비판하고, 국민에게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는 어그러짐 없는 태도를 선보였다.
[심상정의 순간 ④] 4월 25일, 4차 대선 TV토론회에서의 '1분' (문재인-홍준표 후보의 '동성애 반대한다'는 토론 이후 곧바로)심 : "저는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입니다. 저는 이성애자지만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사회자 : "시간 다 됐습니다."심 : "1분 더 쓰겠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차별금지법, 또 계속 차별금지법 공약으로 냈는데 그것을 후퇴한 문재인 후보께 매우 유감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심상정의 1분'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됐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당시 유력 대권 후보의 가혹한 말이 TV를 통해 온 국민의 뇌리에 스며들어가던 그때, 심상정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1분 발언권 찬스를 사용해 차별적 발언을 시정했고 비판했다. 심 후보의 발언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완전히 무지갯빛을 잃어버렸을지 모른다. 심 후보가 1분 동안 성소수자들에 대한 위로를 건네는 순간에는, 간담이 서늘했던 분위기가 잠시나마 사라졌다.
심상정은 이렇게 소수자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하려 노력했고, 자신의 이러한 노력이 소수자들에게 분명한 의미가 되기를 바랐다. 선거에서의 유불리를 따져 자신이 생각하는 ' 옳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는, 그의 노력 속에서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심상정은 기독교계의 차별금지법 철회 요구에 무릎을 꿇지 않은 유일한 후보였다. 심상정은 지난 2월 22일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18대 총선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지역구 목사님들이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입장을 철회하면 우리가 조직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했지만,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심상정은 당시 고작 5000표 차이로 낙선했고,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당선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심상정은 진보정당의 대표주자로서, 지금 이런 절실한 진보적 의제에 대해서 사명감을 갖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진보정당의 존재 의미는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잇었다. 그 사명감을 '심상정의 1분'으로 증명하며 진보정당 존재 의미를 되새겼다. 진보 정당이 소수자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왔다는 것을 심상정이 보여준 셈이다.
물론, 심상정은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절대적으로 흠결이 없는 후보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한 지점들에 대한 피드백 과정을 통해 그는 정치적으로 좀 더 견고해질 것이다. 더불어 심상정 후보의 사랑할 만한 여러 순간과 지점들 역시, 진보의 미래를 진단하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유의미한 기표로 작동할 것이다.
심상정이 선거판에 뛰어든 스무날 하고도 사흘은, 민주주의가 펄떡펄떡 깨어 살아간 순간들이었다. 심상정이 선사한 다원적이고 가치지향적이었던 선거전의 관객이 된 경험은 정말 근사했다.
그가 낙선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엉엉 울어버릴 필요도 없고, 세상에 정의는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일 필요도 없다. 심상정은 떨어질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은, 어찌 보면 그의 지지자들과 그 스스로에게 원동력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 유익한 한계는 심상정 후보가 길을 잃지 않게 해주었고, 소수자를 향한 가치를 덤덤하고 묵묵하게 지켜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늘부로 정치적인 방학은 끝이 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무주공산 청와대를 지키게 됐다. 그리고 심상정은 다시 여의도로 돌아간다. 그에겐 지켜야 할 약속과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그가 이끄는 소수 정당은 멜로드라마틱한 하루보다 부박한 정치의 현실에 직면하는 순간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때는 '진보정당 최다 득표'로 찬란하게 기록될 이 선거를 그리워하리라. 그리고 그 그리움을 원동력 삼아 한 발자국 더 진보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리라. 심상정, 그의 존재로 우리네 일곱 번째 민주선거는 뼈와 살이 여물고 피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