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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일의 왕비>.
<7일의 왕비>. ⓒ KBS

KBS 드라마 <7일의 왕비>는 실제 역사와 무관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사실과 가까운 면도 있다. 그것은 불리한 현실을 인식하고 몸을 낮추면서도 결정적 한 방을 노리는 중종 임금(연우진 분)의 성격이다.

드라마에서는 중종이 이복형 연산군(이동건 분)을 몰아내고자 그런 기질을 발휘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왕이 된 다음에 보수파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그런 기질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런 특성을 기반으로 중종은 16세기 판 검찰 개혁을 성사시키고 보수파 정권을 약화시켰다. 이로써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는 임금이 허수아비라서 임금과 정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임금이 보수파 정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중종은 아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1506년에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이끄는 반군의 추대로 임금 자리에 올랐다. 열아홉 살이었던 그는 반군의 추대로 왕이 되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치욕을 겪었다.

정권을 잡은 반군은 중종의 부인인 신씨가 연산군의 처조카라는 점, 연산군 정권 실세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쿠데타 7일 뒤에 신씨와 중종을 강제로 이혼시켰다. 그런 뒤에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이했다.

중종은 훈구파라 불리는 쿠데타 주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수아비 삶을 살았다. 조선 후기 김시양의 수필집인 <부계기문>에 따르면, 중종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이 자신과 함께 있다가 돌아갈 때면 언제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세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간 다음에야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힘이 없었지만, 실세 임금이 되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훈구파가 워낙 강했으므로 그 꿈을 가슴 한 켠에 숨겨두고 때만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흐르고 쿠데타 주역들이 죽어갔다. 쿠데타 4년 뒤인 1510년 박원종이 죽고, 1512년 유순정이 죽고, 1513년 성희안이 죽었다. 3거두의 죽음으로 쿠데타 세력이 점차 약해지던 상황에서 1515년에는 장경왕후도 눈을 감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야당 혹은 재야 진보세력인 사림파(유림파)가 행동에 나섰다. 이참에 훈구파를 약화시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중종도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사림파가 훈구파를 공격하는 상황을 이용해, 중종은 16세기 판 검찰 개혁을 벌이고 이를 통해 구세력의 기반을 흔들어놓았다. 

사림파는 중전 자리가 비었다는 명분으로 신씨와 중종의 재결합을 추진했다. 훈구파가 이혼시켜 놓은 신씨를 중전 자리에 앉힘으로써 훈구파의 입지를 축소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총대를 메고 이런 목소리를 대변한 이들이 있었다. 전라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었다. 이들은 신씨를 중전 자리에 앉히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런 상소는 쿠데타 세력의 집권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 주역들이 몰아낸 신씨를 도로 불러들이자는 것은, 그 주역들을 정계에서 내보내자는 말과 같았다. 이런 상소를 현직 지방관들이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훈구파 조정 대신들은 외형상으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상소가 신경 쓰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신경은 쓰였지만,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중종이 전처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쉽사리 재결합하지 못할 거란 기대감이었다. 연산군과 함께 신씨가 쫓겨나지 않았다면, 중종은 왕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런 중종이 왕위를 포기하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재결합을 추진하진 않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또 박상·김정의 상소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임금에게 조강지처와 재결합하라는 상소였다. 이런 충성스러운 상소를 대놓고 비판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이유로 보수파가 가만히 있었건만, 눈치도 없이 분위기를 깨고 박상·김정을 공격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대사간 이행이었다. 대사간은 국정 비판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장이었다. 이행은 대사헌 권민수를 동조자로 만들었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장이다. 사헌부는 법규 위반자를 찾아내고 공직자의 비행을 조사했다. 또 기소권(형사소송 신청권)과 구형권(형벌 요청권)도 있었다. 그래서 검찰청에 상응했다. 그런 대사헌의 장이 사간원의 장과 합세해 공격에 착수했다. 박상·김정을 처벌하고 유배 보낸 것이다.  

지방 출신의 개혁적 선비 그룹인 사림파는 연산군의 아버지 때인 성종시대(1469~1494년)에 중앙정계에 집중적으로 진출했다. 이들이 장악한 관청은 주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다. 홍문관은 군주의 자문에 응하는 관청이었다.

사림파가 세 관청에 주로 진출한 것은, 직무의 성격상 학문적 능력이 필요한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세 관청은 3사(司)로 묶여서 불렸다. 짝꿍 기관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보수세력 훈구파는 행정 관청인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장악했다.

성종시대부터 검찰청인 사헌부가 사림파한테 장악됐지만, 검찰권이 사림파에 의해 남용되지는 않았다. 보수파가 6조를 쥐고 있어 정치적 균형이 이루어진 덕분이다. 그런데 연산군 시대(1494~1506년)의 공안정국으로 사림파가 대거 죽임을 당한 데 이어, 훈구파가 연산군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주도함에 따라 사헌부는 확실하게 보수파에 의해 장악됐다. 사헌부가 보수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된 것이다. 명분이 약한 박상·김정 처벌 작업에 사헌부가 참여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검찰 개혁에 관한 전문가 대담집인 최강욱 변호사의 <권력과 검찰> 제1장에서 한겨레 신문 김의겸 기자는 "강기훈 사건의 경우 국정원이나 경찰이 손도 안 댔는데, 검찰이 먼저 노태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간 거죠"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다른 권력기관들이 손도 안 대고 있는데 사헌부가 사간원과 함께 훈구파 정권을 보호하고자 박상·김정 사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간 것이다. 임금과 조강지처의 재결합을 촉구하는 상소라서 어찌 보면 문제될 것도 없는 일을 중대 시국사건으로 '만들어' 간 것이다.  

이처럼 1515년의 조선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뜻밖의 인물이 불쑥 등장했다. 과거시험 2단계인 대과에 급제한 지 석 달밖에 안 된 34세의 신진 관료 조광조였다. 조선시대의 가장 유명한 개혁가 중 하나인 조광조가 바로 이때 등장했다.

 조광조 초상화. 1750년에 정홍래가 그린 작품.
조광조 초상화. 1750년에 정홍래가 그린 작품. ⓒ 위키백과

조광조는 과거 급제 직후에 성균관 직원이 됐다가 사헌부 감찰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날의 검사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음력으로 중종 10년 11월 20일(양력 1515년 12월 24일)에 사간원 정언(충언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직 검사가 짝꿍 기관으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중종 10년 11월 22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전직 검사가 된 지 2일 뒤에 조광조는 대사헌과 대사간의 행위가 '언로(言路)를 막고 국가 분열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언로를 막는다는 것은 요즘 말로 바꾸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것이었다. 훈구파의 시녀가 된 검찰이 정권의 비위를 맞추느라 건전한 의사표현까지 막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상소문에서 조광조는 사헌부 및 사간원의 전면적 인사교체를 요구했다. 신입자인 자신을 포함해서 대사헌과 대사간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몇 달도 근무 안한 전직 검사가 검찰총장의 교체를 요구한 셈이다.

임금 된 뒤로 때를 기다려온 중종에게 조광조는 '어느 날 문득 나타난 사랑' 같은 존재였다. 조광조는 20대 때 조선왕조 전복 음모에 가담했다가 명문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훈방됐다. 그 뒤 운동권 생활을 청산하고 과거시험 1단계인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조광조는 국립대학 유생이 되자마자 '선비다운 바른생활 캠페인'을 벌여 교직원과 학생들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혼자 기숙사에 있을 때도 방바닥에 눕지 말고, 선비답게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 있자'는 캠페인이었다.

이 때문에 교직원과 유생들은 조광조를 내쫓을 궁리까지 했다. 너무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순간 조광조의 팬이 되고 말았다. 혼자 있을 때도 조광조 생각이 나서 방바닥에 드러눕지 못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런 조광조의 캐릭터는 중종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전직 검사 조광조의 목소리를 활용하면 검찰 개혁을 일으키고 이를 명분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처음에는 조광조의 의견을 반대하는 듯이 행동했다. 그래서 그 상소를 기각했다. 그래도 조광조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검찰총장과 대사간을 바꾸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제야 중종은 확신을 갖고 검찰 개혁에 착수했다. 조광조가 역할을 해주리란 기대감을 갖고 사헌부·사간원의 인적 쇄신에 착수한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쿠데타 주역들이 저 세상으로 떠남으로써 훈구파가 어느 정도 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사간원을 쇄신한 다음에 중종은 조광조에게 힘을 실어주고 개혁 정권을 꾸릴 수 있도록 지원했다. 검찰 개혁을 범정부 개혁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를 통해 중종은 훈구파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중종은 훈구파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적당히 살려두었다. 사림파와 훈구파가 상호 견제하는 속에 군주가 조정자 역할을 하는 구도를 만든 것이다.

 사헌부 터. 서울시 광화문광장 서편의 세종로공원에 있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미국대사관.
사헌부 터. 서울시 광화문광장 서편의 세종로공원에 있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은 미국대사관. ⓒ 김종성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개혁을 추진한 동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검찰과 손잡으면 청와대에서 걸어서 못 나온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대답했다. 걸어서 기분 좋게 나올 수 있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자 검찰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03년 3월 9일 TV로 생중계된 '검사와의 대화'도 기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시도는 실패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검찰 담당)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의 운명>에서 "행사가 시작됐는데, 이건 목불인견이었다"고 탄식했다. "젊은 검사들은 끝없이 인사문제만 되풀이해 따지고 물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준비한 검찰개혁 문제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인사 불만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인사 불만 외에, 검찰 개혁을 준비해 와 말한 검사는 없었다"고 <문재인의 운명>은 말한다.

1515년에는 이틀 전에 평검사를 그만둔 조광조가 노무현이 기대했던 평검사들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임금이 그만하라고 말하는데도 조광조는 사헌부·사간원 전면 쇄신을 집요하게 요구함으로써 검찰 개혁을 화두로 띄우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헌부 검사들은 인사 불만을 꺼낼 틈도 없이 짐을 싸서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515년의 조선은 검찰 개혁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처음부터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중종은 검찰 내부의 개혁 목소리를 증폭시켜 개혁 분위기를 만들었다. 조광조 같은 걸출하고 의욕적인 '전직 평검사'가 적시에 출현했기에, 중종은 그를 믿고 분위기를 띄울 수 있었다. 검찰개혁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종 시대에는 이처럼 전직 검사가 적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임금이 그에 화답하는 방법으로 검찰 개혁을 성사시켰다.


#7일의 왕비#검찰 개혁#조광조#중종#사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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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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