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여러 번 보아야 한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처음 읽었을 땐 춤사위같이 덩실거리는 과장된 몸짓이 좋았다. 두 번째 읽었을 땐 글이 많지 않아도, 자세히 그리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의 특징을 유머 있게 잘 살려 좋았다. 아마 그뿐이었을 거다. 일곱 살 둘째의 지적이 없었다면.
"엄마, 근데 이 아저씨는 왜 머리가 길어?"그림책 <밥. 춤> 이야기다. 세 번째 읽었을 때, 아이의 질문을 듣고 보니 등장인물이 모두 여자였다. 막연히 구두수선이나, 택배,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남자'라고 생각했던 건 내 고정관념이었다.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엄마는 페미니스트>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성 역할은 완벽한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이라는 테마에서 이렇게 말한다(이 책은 실제 저자의 친구가 '어떻게 하면 아이를 페미니스트적 시각에서 올바르게 키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고 쓴 15통의 편지 형식을 띠고 있다).
'너는 여자니까' 뭔가를 해야 한다거나 해선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마, '너는 여자니까'는 그 무엇에 대한 이유도 될 수 없어. 절대로.(중략) 아이들한테 성 역할이라는 구속복을 입히지 않는 것은 아이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과 같아. 치잘룸(친구의 딸 이름)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봐 줘. 어떠어떠해야 하는 여자애로 보지 말고, 한 개인으로서 그 아이의 장점과 단점을 봐 줘. 여자애는 어때야 한다는 잣대로 재지 말고. 그 아이가 가장 잘 했을 때를 기준으로 재어 줘. 성 역할은 우리 안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우리의 진정한 욕망, 욕구, 행복에 어긋날 때조차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아. 한번 배우면 떨쳐내기 어려우니까. 치잘룸이 처음부터 거부하게끔 만드는 것이 아주 중요해.(하략)'이 글을 읽고 보니 그림책이 더욱 더 다시 보였다. 그림으로 표현되지 않은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지난 8월 중순 <밥.춤> 정인하 작가를 경기도 산본 자택에서 만났다.
- 그림책을 처음 읽을 때 직업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일하는 여성을 다룬 이유가 있나."노동하는 사람들 모습을 그렸으면 했고, 그걸 춤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발레리나는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발레 동작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랄까. 여성노동자로만 한정하게 된 건 그림책을 만들면서 그렇게 된 거예요. 남자를 배제했다기보다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어요. '구두 수선하는 노동자'를 그릴 때도 아저씨로 해야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왜 굳이 남자여야 하지?'라는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가 찾아봤더니, 구두 수선 하시는 여성 노동자가 있더라고요. 환경 미화원도 있고. 뭐든 다 할 수 있던 거였는데.(웃음) 이 작업을 하면서 저 역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어떤 직업이든 여성도 있고 남성도 있는데, 인원 수가 많다고 해서 남자로 그리면 그게 또 대표성이 되어 버리니까. 그래서 아예 여성의 노동으로 좁혀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밥. 춤> 제작기가 궁금하다."디자인 일을 하다가 저다운 그림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 hills에서 공부했어요. 2012년 졸업 전시 작품으로 우리 주변(동네)에서 볼 수 있는 노동하는 사람을 주제로 한 캘린더를 제작했어요. 한 달에 두 장면씩 24명의 직업을 다뤘는데 그 중에서 몇 개 직업을 추려서 <밥.춤>이라는 그림책을 내게 된 거예요."
- 2012년이면... 5년이나 걸린 이유가 있나."캘린더를 만들 때는 노동하는 사람들이란 주제만 있었는데, 그림책으로 만드는 건 또 다르더라고요. 이야기가 필요하고, 리듬도 필요하고, 흐름도 필요하고. 처음엔 그림도 있겠다, 책으로 묶기만 하면 되겠네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웃음) 지금과 달리 글도 많이 넣어보고 했는데, 뭔가 군더더기가 있어 어색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하철에서 갑자기 생각이 난 거예요. '춤을 춰요' 이 한 마디가 떠오르면서 이렇게 풀면 되겠구나 그랬죠.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 퀵 배달 노동자부터, 택배 노동자, 세신사, 시장 상인, 건설 노동자, 고층 빌딩 청소 노동자, 교통경찰관 등등 그림책에 여러 직업군이 나오는데 취재를 따로 한 건가."취재를 따로 한 건 아니에요. 평소 주변에서 사람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작 같은 건 계속 볼 수 없으니까(웃음)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했어요. 몸을 중심으로 관찰하되, 따로 발레 동영상 같은 걸 보면서 그림을 그렸죠. <생활의 달인>을 보면 즐겁게 노동하시는 모습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것도 참고를 하고. 관찰한 거를 그대로 재연하려고 하면 좀 어색하더라고요. 고층 빌딩 청소 하시는 분 중에 실제 여성 노동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일도 넣고 싶었던 것 같아요.(웃음) 일하는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여성이어도) 괜찮지 않나?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 작가의 말대로 단순히 재연하는 그림이었으면 애들이 별로 안 좋아했을 텐데, 유머가 있어서 재밌게 읽었다. 작은 아이는 발레를 하는데, 책을 보고 동작을 따라하고 그러더라. 작가는 개인적으로 어떤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드나."개인적으로는 야채 장수 그림이 좋아요. 꼭 넣고 싶은 직업이었는데, 야채 장사가 어떤 포즈를 지을까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가 대파를 봉투에 넣거나 할 때 군무처럼 칼을 휘두르는 느낌이 들어서 그걸 그려 보면 어떨까 싶어 작업을 했어요. 망치기도 많이 하고 정말 여러 번 그렸어요. 뭔가 아쉬운 느낌이 계속 들어서 포즈, 의상 바꾸면서 계속 그렸어요. 세신사도 여러 번 그렸어요. 처음에는 전신을 다 그렸는데, 약해 보인다는 의견 있어서 수정하고. 또 그린 지 몇 년이 지나다 보니까 달리 보이는 것도 생기고요. 전시작품 그림이 그대로 들어간 건 몇 개 없어요. 하도 많이 그려서 종이값 비싼 건 이젠 그다지 신경쓰지 않게 됐을 정도예요.(웃음)"
- 그림책 속 여성 노동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작가만의 특징이 있다. 이런 식으로 풍채를 크게 그린 의도가 있다면. "노동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강직한 느낌이에요. 여성이니까 가벼워 보이면서도 어떤 무거운 느낌을 원했어요. 여성이라고 하면 보통 둥글둥글하고 물렁물렁해 보이는 모성스러운 느낌을 떠올리는데, 조금은 남자라고 느낄 수도 있을 만한 튼튼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달까. 그러면서도 (튼튼한 몸과 달리) 손이나 발은 섬세하게 그렸는데 서로 위화감이 별로 없더라고요.(웃음) 여성이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서 재밌게 그렸어요. 그림으로 보면 둥글둥글 하지만, 발을 보면 힘이 셀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실제 노동하는 여성들을 보면 힘도 세고 진짜 많은 일을 하잖아요. 큰 주목은 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삶을 꾸려가는 강한 여성들이 주변에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멋져 보이게 그리고 싶었어요."
- 제목 그림이나 그림 속 서체도 붓으로 직접 쓴 건가. "네. 처음에는 글씨도 타이포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안 어울리더라고요. 너무 막막했어요. 글씨는 써본 적이 없어서 엄청 많이 썼어요. 붓은 아니고 나무 막대기로 썼는데, 그림과 글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제목을 <밥.춤>이라고 한 건?"'밥벌이'라는 의미를 살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밥벌이를 위한 노동이지만 신나게 사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밥, 춤 그런 느낌으로."
- 아쉬웠던 부분이나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다면."피부색 표현이 정말 미묘하거든요. 너무 살구색처럼 나와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좀 어둡게 나오면 또 그렇고. 보는 모니터마다 색감이 다르니까 그걸 맞추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도 감으로 조금씩 맞추면서 원하는 색으로 잘 나온 것 같아요. 너무 밝아질까 봐 걱정했거든요."
- 이래서 작가와의 대화를 하는구나.(웃음) 설명을 들으니 그림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제가 작가의 말에 '정연자 님과 임덕순 님께 이 책을 드립니다'라고 적었는데,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세요. 시어머니가 세신사였는데, 최근까지 정말 오래 일하셨어요. 아들 둘 건사하시면서 열심히 사신 분인데 이 헌사를 보고 너무 좋아하셨어요. 책에 이름을 써줘서 너무 고맙다고. 뿌듯했죠."
-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었나."어려서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만화 그려서 친구들끼리 돌려보기도 하고. 그런데 만화가는 돈을 벌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아서 고등학교도 인문계를 갔는데 만화 동아리에서 활동하고(웃음). 학교 졸업하고 디자인 하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다 보니 그림을 그리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때부터 프리랜스로 활동하고 있어요. 에이전시에 들어가려고 낸 포트폴리오도 드로잉이었어요."
- 드로잉 같은,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건가."드로잉 그림으로 독립출판 <부드러운 거리>를 내기도 했어요. 재밌는 경험이었죠. 일하면서 놀면서 틈틈이 그린 걸 모은 건데, 그쪽으로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그림책에 나온 그림처럼 아줌마, 아저씨, 노인들 그리는 게 좋더라고요. 이 책으로 인연이 돼서 단행본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도 있어서 작업 중인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 <밥.춤>은 작가가 낸 첫 글그림책 <요리요리 ㄱㄴㄷ>(정인하 작가는 개명을 했는데, 이 책은 개명 전 이름 정은영으로 되어 있다-기자말)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참여했던 <곤충 탐험대가 떴다> <똑똑, 남는 복 있어요?> 같은 그림도 그렇다."<밥.춤>이 조금 더 제 성향에 맞는 그림인 것 같긴 해요. 다른 그림들은 저에게 있는 또다른 면인 것 같아요. 계속 작업을 하다 보면 그 중간에 접점이 찾아지지 않을까요? 컬러감도 어느 정도 있고 드로잉 작업도 가미된."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준비중인 단행본 작업이 잘 되어서 글도 써 보고 싶고, 그림도 계속 그리고 싶고, 컬래버레이션으로
머그컵이나 에코백 등 디자인 작업에도 참여했는데 그런 소품들도 만들 수 있으면 계속 하고 싶어요. 그림책은 하면 할수록 좋은 것 같아요. <밥.춤>의 경우는 오래 걸려서 그런지 더 각별했어요. 고생고생해서 냈는데도 '이게 최선이었을까? 더 잘 할 수는 없었을까?' 막 이런 마음이 들고, 아쉬운 부분이 생기더라고요.(웃음) 다음에는 컬러감이 들어간 책을 해 보고 싶어요. 둥실하게 차 있는 그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