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 모임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으로 내정된 1983년 8월 이후, 창립준비모임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모임에서는 우선 조직을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로 이원화하기로 결정했다. 집행위원회는 처음부터 공개 활동 전면에 나서는 조직이다. 반면에 상임위원회는 2진 개념으로, 처음에는 공개되지 않고 집행위가 탄압을 받아 전원 구속이 되어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 다시 집행부를 구성할 책임을 지는 조직이었다. 집행부 전원 구속은 당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아래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공개 상임위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선 당면과제는 집행위 구성이었다. 누가 1순위로 감옥에 갈 것인가?
9월 초, 소사(현재의 부천시)에서 창립 준비 모임이 열렸다. 집행위를 구성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구월동에서 김근태 의장과 함께 뒹굴었던 박우섭이 맨 먼저 나섰다. 박우섭은 김근태가 의장으로 나서는 순간 자신은 김 의장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집행위에 자원했다. 김근태, 박우섭 외에 나머지 3~4명의 집행위원이 필요한데 누가 맡을 것인가?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정적을 깨고, 홍성엽이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집행위에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1970년대에 민청협 총무를 맡아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홍성엽의 집행위 지원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나서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가 유신헌법에 의해 새 대통령을 뽑겠다고 발표했을 때, 이 통대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청년들이 계획한 것이 바로 YWCA 위장결혼식이었다. 계엄 하에서 원천적으로 정치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를 돌파하기 위해 명동 YWCA 강당에서 결혼식을 위장하여 통대선거반대 국민대회를 개최하려고 한 것이다.
위장결혼식이지만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청첩장에 박힐 신랑 이름은 최소한 실제 인물이어야 했다. 최규하 발표가 있던 날 열린 민청협 8인 운영위원회에서 홍성엽이 신랑역을 자청했다. 홍성엽은 이후 현실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살며 운동에 헌신하다가 2005년 10월 7일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계엄 하에서 위장결혼식의 신랑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고,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감옥 갈 것이 뻔한 길을 담담하게 선택한 것이다.
이어 박계동과 연성수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박계동은 고려대 정외과 3학년이던 1975년 5월, 이른바 '명동성당 전국대학생연맹사건'으로 첫 징역을 살았다. 당시 과 선배이자 서클 선배였던 한경남과의 인연으로 험난한 인생행로에 들어선 박계동은 출소 이후에도 늘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77년부터는 같은 학교 출신 조성우가 회장으로 있던 민청협의 간부로 활동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광주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배후로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채 전국에 지명수배되기도 했었다. 수배 상태에서 구월동에 살던 명동사건 공범 이명준의 집을 드나들면서 구월동 수배자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당시부터 김근태와도 안면이 있었다. 일찍부터 공개운동으로 감옥과 경찰서를 드나들어 수사기관의 요주의 인물로 알려졌던 그였기에 고대 쪽에서 민청련 집행부에 참여할 사람으로는 그가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소사 모임에 참석한 그는 역전의 용사답게 망설임 없이 집행위 참여를 선언했다.
연성수의 참여는 회의 전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연성수는 1975년 5월 서울대 식물학과 2학년에 재학 중 이른바 '오둘둘 사건'(5월 22일 서울대에서 긴급조치9호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학생시위)에 주동자로 참여해 징역을 살았다.
학생 때부터 반유신 문화운동패인 '가면극회'의 일원이었던 연성수는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민중문화운동판을 떠나지 않고, 김민기, 채희완, 홍석화, 황선진 등과 함께 현장극단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한두레'라는 이름으로 아현동에 애오개소극장을 열고 '진오귀굿', '예수전' 등 저항성 강한 마당극을 무대에 올리고,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터 등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민청련 집행부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은 민중극단 한두레 모임에서였던 것 같다. 당시 학교, 학번별로 이루어졌던 민청련 기반조직 모임과 달리 별도의 논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던 문화운동 쪽은 황선진과 김도연이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집행부 참여를 권유받은 연성수는 큰 고민 없이 집행부 참여를 결정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내 자신이 민중 출신이다. 그리고 문화판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이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아내 이기연과도 의논하여 동의를 얻었고, 연로한 어머니가 반대할 것을 염려했으나 아들의 단호한 결심에 어머니도 따라주었다.
이범영도 집행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기반 조직을 오랫동안 조직하고 관리해 온 이범영에게 뒤에 남아서 계속해서 기반 조직을 관리해주도록 부탁했다.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맡겨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했던 장영달도 집행위에 포함시켰다. 집행위원들 간에 부서도 정했다. 총무와 재정을 나누어 총무부장에 박우섭, 재정부장에 홍성엽, 그리고 홍보부장 박계동, 사회부장 연성수로 정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노동현장과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창립총회에서는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장영달은 연배를 고려하여 부의장으로 내정했다.
이어서 상임위 구성을 논의했다. 상임위 의장에 최민화가 내정되었다. 김근태를 의장으로 추대하는 데 앞장섰던 최민화는 직장이 있어 준비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의 거취는 전적으로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해놓고 있었다.
준비 모임에서는 최민화에게 1진 집행위 유고 시 후속 집행위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향후 재정문제가 중요한데 재정 조달을 위해서도 OB모임의 물주였던 최민화가 2선에 남을 필요가 있었다.
상임위 부의장에는 이해찬과 이을호가 내정되었다. 이해찬의 냉철하고 정확한 정세판단 능력을 평가한 것이었지만, 향후 상임위가 담당하게 될 기관지 출판을 위해서도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해찬이 상임위에서 역할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을호도 탁월한 이론적 능력을 인정하여 상임위 부의장으로 배정되었다.
이것으로 집행부 구성은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창립총회 준비한편으로 창립총회를 열기 위한 실무 준비도 집행부 중심으로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단체의 명칭은 준비모임에서 민주화운동청년(전국)연합, 약칭 민청련으로 결정되었다. 전국을 괄호로 넣은 것은 아직 지역 조직이 건설되기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하향식으로 조직해 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으로부터 상향식으로 전국 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원칙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것은 지역 운동의 자발성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적절했던 것이었지만, 창립 이후 전국에서 지역 운동 조직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면서 '전국' 호칭은 사라진다.
창립총회에서 발표할 문건으로 창립선언문과 발기문을 준비했다. 이 두 문건을 준비하기 위해 김도연을 중심으로 문건준비팀이 따로 꾸려졌다. 이 팀에는 황선진과 권형택이 함께 했다. 이 문건팀은 김도연의 집과 사무실에서 3~4차례 만나서 회의를 하고 문건의 내용을 논의, 검토했다.
처음에 창립선언문은 황선진, 발기문은 권형택이 초안을 써와서 함께 검토했는데, 김도연이 의견을 많이 내고 문장도 다듬었다. 이렇게 수정보완된 두 문건은 창립준비모임에 넘겨졌는데, 발기문은 대체로 문건팀에서 작성한 대로 통과되었으나 창립선언문은 논란이 되었다. 그래서 김근태 의장이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해서 다시 만들었다.
이 두 문건은 보안을 생각해서 인쇄소에 넘기지 않고, 원지에 타자를 쳐서 드럼에 원지를 올려 돌려 찍는 수동식 인쇄기로 직접 찍었다. 이 문건 인쇄는 홍보부장 박계동이 당시 EYC 간사로 일하는 후배와 함께 기독교회관에 있는 EYC 등사기를 이용하여 밤 시간에 비밀리에 수행했다. 각각 300부 정도씩 준비했다.
창립총회를 어디서 할 것인지 대회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과제였다. 200명쯤 들어가는 곳이면서 대회 전에 수사기관에 포착되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일반적으로 많이 집회 장소로 사용하는 곳으로 YWCA회관이나 흥사단 강당 등이 있었지만, 수사기관이 항상 주목하고 있는 곳이라 사전에 발각되기 십상이었다.
오랫동안 가톨릭 쪽과 함께 운동을 해왔던 박계동이 여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박계동이 당시 한강성당 주임신부로 있던 함세웅 신부에게 부탁하여 수녀들의 수양기관으로 쓰이고 있던 돈암동 상지회관 예배실을 쓰기로 예약한 것이다.
상지회관은 성북구 돈암동의 아리랑 고개에 있는 가톨릭 수녀들의 수양기관인데, 지금은 '상지 피정의 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재개발 사업으로 주변에 산뜻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1983년 당시에는 상지회관으로 올라가는 길이 차 한 대가 겨우 비켜 갈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었고, 골목 양쪽에 낡은 주택들이 죽 늘어서 있는 전형적인 서울의 서민층 주택가였다.
마지막 난제를 해결한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마지막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어떻게 하면 무사히 창립총회를 치를 수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회 장소가 수사기관에 알려지면 대회를 봉쇄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라 무엇보다도 대회 장소에 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대회 날짜는 대회 1주일 전쯤, 조직을 통해 확인된 회원들에게만 구두로 전달했다. 고문·지도위원들에게도 가급적 직접 만나서 전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전화가 도청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대회 장소를 각 대학 기별 대표들에게만 알려주고 그 대표가 회원들을 일정 장소에 모이게 하여 함께 데려오는 방식을 취했다. 집행부원들은 정보가 새서 사전 구금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대회 3~4일 전부터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