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민주 두꺼비의 탄생

 1983년 10월 29일,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1983년 10월 29일, 사무실 입주식에서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현판을 달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민청련은 경찰병력이 둘러싼 살벌한 상황 속에서 창립총회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총회 직후 안기부로 연행됐던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원들도 우여곡절 끝에 일주일여 만에 전원 무사히 풀려났다. 이로써 민청련은 일단 전두환 독재정권의 유화조치 틈새 속에서 공개청년운동의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신군부의 철권통치 속에서 절치부심하며 숨죽이고 있던 민주청년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이범영의 말처럼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확보한 그 활동공간은 24시간 기관원들의 감시 아래 놓여있는 불안정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는 민청련을 설화 속의 독사와 두꺼비에 비유했다. 두꺼비는 힘으로는 언제든지 독사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꺼비는 비록 독사에게 잡아먹히지만 두꺼비를 잡아먹은 독사도 두꺼비의 독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잡아먹힌 두꺼비는 독사의 몸을 자양분으로 삼아 품고 있는 알을 부화시켜 새끼들을 탄생시킨다.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사회부장 연성수와 부인 이기연이 제작한 두꺼비 판화. ⓒ 민청련동지회

말하자면 민청련은 언제든지 독재정권의 탄압에 희생될 각오를 하면서 출범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바탕으로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민중들의 세상을 탄생시킬 것이라는 당찬 희망을 가졌다. 이 희망은 민청련 초기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민청련 집행부와 회원들을 지탱해 주고 당당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이 두꺼비의 비유는 사회부장 연성수가 전래 민담에 나오는 두꺼비 설화에서 따온 것인데, 이후 민청련 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연성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하나는 어렸을 때, 손에 흙을 덮고 두드리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하며 놀던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이 헌집이고, 우리가 원하는 새 세상은 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또 하나는 두꺼비는 대개 알을 품으면 독사한테 가요. 일부러 독사 앞에 가서 약을 올려서 자기를 잡아먹게 만들어요. 잡아먹히면 자신은 죽지만 독사를 영양분으로 해서 새끼가 부화하거든요. 그게 우리 공개운동의 취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한 거지요.

우리가 앞에 나서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면 탄압을 받겠죠.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본질이 폭로되고 그로 말미암아서 전두환 정권이 끝장이 날 거다, 그런 걸 상징한 거였죠."

이 두꺼비 이야기는 연성수의 부인 이기연이 판화로 새겨 민청련의 공식 로고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초부터 발간되는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도 이 두꺼비 판화가 표지를 장식했다.

 민청련 두꺼비를 제작한 이기연. 1985년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현재 '질경이 우리옷'을 경영하고 있다.
민청련 두꺼비를 제작한 이기연. 1985년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현재 '질경이 우리옷'을 경영하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사무실 확보를 위한 투쟁

김근태 의장과 집행부는 안기부에서 풀려나자 우선 활동근거지가 될 사무실부터 물색했다. 10월 하순 드디어 종로2가에 적당한 사무실이 임대로 나와 있는 것을 찾아냈다.

종로 2가 사거리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대로 왼편에 있는 파고다빌딩 5층 514호실이었다. 10평쯤 되는 사무실인데, 도심 한복판이라 우선 교통이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오래된 건물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 임대료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김근태 의장이 박우섭 총무와 함께 직접 가서 부인 인재근의 명의로 사무실을 계약했다.

사무실 보증금은 예춘호 선생 등 재야 원로들이 마련해 준 찬조금에 회원들이 낸 회비를 보태 마련했다. 계약할 때 민청련이 대정부투쟁을 하는 재야단체라는 걸 알면 계약해 주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출판사 사무실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관리인은 별생각 없이 순순히 1년 기한의 임대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사무실 집기는 중고가구점에서 일부 사고, 회원들이 경영하는 출판사들에서 남는 집기를 보내 주었다. 전동타자기 한 대와 수동식 먹지 인쇄기 1대를 장만하고, 전화도 놓았다.

10월 29일 2시에는 회원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을 갖고 현판식도 했다. 내빈들과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근태 의장과 장영달 부의장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란 글자가 선명한 현판을 출입문 위에 달았다.

 민청련 창립 당시 재정에 큰 도움을 준 1. 장하구 종로서적 사장과 2. 한글 타자기 개발자이자 국내 최초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
민청련 창립 당시 재정에 큰 도움을 준 1. 장하구 종로서적 사장과 2. 한글 타자기 개발자이자 국내 최초 안과의사인 공병우 박사 ⓒ 민청련동지회

민청련 초기 운영자금 마련에는 김지하의 수묵화가 큰 도움을 주었다. 재정부장 홍성엽이 김지하 시인에게서 난초 그림 10점을 받아 왔다. 이 '김지하 난'을 마침 일본을 방문하는 성래운 교수에게 부탁해 일본교포들에게 5점을 팔고, 나머지 5점은 국내 지인들에게 판매해 500여만 원을 만들었다. 공병우식 타자기로 유명한 공병우 선생은 타자기 수십 대를 협찬해 주었다. 문익환 목사와 친분이 있었던 종로서적 장하구 회장도 후원금을 내놓았다.

10월 30일 9시, 새로 마련한 사무실에 첫 출근하는 집행부원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러나 곧 사단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파고다빌딩은 비리사학의 상징으로 세상에 알려진 상지대학의 설립자 겸 이사장에 민정당 국회의원을 3번이나 지낸 김문기의 소유였다. 입주자가 민청련이라는 걸 안 김문기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입주한 지 1주일쯤 지났을 때 관리인이 찾아와서 보증금을 돌려줄 테니 방을 비워달라고 통고했다. 민청련이 입주식을 하자마자 빌딩 관리실로 안기부, 치안본부, 서울시경, 종로서 정보과 등 온갖 기관에서 민청련 담당자라는 사람들이 찾아와 동향을 캐물었던 것이다. 출판사로 알고 별 생각 없이 계약해준 빌딩 측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야단이 났고 그 소식은 김문기에게도 보고됐을 것이다.

총무 박우섭은 관리실로 내려가서 계약서를 꺼내놓고 계약서에 명시돼 있는 계약만료 기간이 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고 항변했다. 쉽게 나갈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관리인은 자기들이 받은 보증금에 이사비조로 상당액을 얹어 주겠다고 회유하는 한편, 만일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여 강제 퇴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이 보기에 민청련은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는 범죄단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약서에 무슨 일을 한다는 내용이 있을 리 없고, 범죄단체도 아닌 민청련이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수는 없었다. 박우섭은 마음대로 해 보시라고 완곡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한 민청련 집행부원들은 빌딩 앞 길거리에 책상, 소파 등 사무실 집기들이 쌓여 있는 걸 보았다. 지난밤에 관리실에서 인부를 시켜 사무실 집기를 모두 들어내 놓은 것이다. 5층 사무실에는 큼직한 자물통을 채워 출입을 막아 놓았다. 그들이 말한 대로 강제퇴거를 집행한 것이다.

 민청련 사무실이 있던 파고다빌딩의 현재 모습. 리모델링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옛 건물 흔적이 꽤 남아 있다.
민청련 사무실이 있던 파고다빌딩의 현재 모습. 리모델링을 했으나 자세히 보면 옛 건물 흔적이 꽤 남아 있다. ⓒ 민청련동지회

여기에 굴할 민청련이 아니었다. 민청련 간부들은 즉시 사무실에 항의하고, 열쇠공을 불러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책상과 집기들을 모두 원래대로 다시 5층 사무실로 올려놓았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런 사태는 계속되었다. 밤중에 밖에 내려놓으면 아침에 올려놓고, 다시 내려놓으면 다시 올려놓았다. 이런 실랑이가 5일간이나 계속됐다.

종로경찰서는 수수방관했다. 관리인 측에서 신고를 했다 하더라도, 쫓아낼 법적 근거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개입해서 유리할 일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1주일 만에 빌딩 측이 손을 들었다. 민청련이 공개단체로 자리 잡는 또 한 번의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기별대표모임과 계반

민청련은 창립총회를 마치고 사무실 마련 등 집행부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한편으로 내부에서는 기반조직의 건설에 주력했다. 중심 역할은 집행부와 함께 이범영, 김도연이 맡았다.

민청련의 기반조직은 이미 기존에 형성돼 있던 출신학교 및 학번별 모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각 단위 모임에서 대표가 한 명씩 나와 대표모임을 구성했는데, 처음에는 이것을 기별 대표조직이라는 뜻으로 '기대'라고 불렀다. 그러다 1984년 들어 조직이 확대되면서부터는 그 단위모임을 '계반'이라 하고, 계반대표를 '계주', 계반대표 모임을 '계주모임'이라 불렀다. 이것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민청련 조직원들끼리만 통하는 일종의 은어를 쓴 것이다.

사실 이 기반조직은 창립총회 이전부터 창립준비모임 형식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각 단위의 공식 대표성을 온전히 갖추지는 않았다. 창립총회 때까지만 해도 서울대 정도가 단위모임 대표성을 갖추었고, 여타 대학들은 대개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창립총회 이후 조직을 정비하면서 각 단위의 대표성을 갖춘, 말하자면 대의원회 성격의 기반조직으로 정비해나갔다.


#민청련#두꺼비#파고다빌딩#연성수#이기연
댓글3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