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련은 그 회원들은 상당수가 주로 서울에 있는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구속과 수감생활을 경험한 이른바 '빵잽이'들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창립 이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각 대학별로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최대 인원을 자랑한 서울대서울대는 72학번부터 78학번까지는 1980년 이후 대체로 학번별 모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동기들이 매월 한두 차례 십여 명 정도씩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모였다. 71학번 이상 60년대 후반 학번 선배들은 숫자도 적고 대개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학번 구별 없이 모였다.
따라서 민청련 조직으로서의 기별대표 즉, '기대'는 초기에는 서울대의 학번별 모임 대표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 기대로 활동한 면면을 보면, 71학번 이상 선배 그룹은 임상택, 72학번은 김도연, 박성규, 73학번 이범영, 박석운, 74학번 권형택, 김영현, 75학번 이우재, 연성만, 76학번 김종복, 77학번 오세중, 유기홍, 78학번 김성환, 진영효 등이었다.
공대 출신은 별도로 모임이 형성되어 기대에는 이래경, 백경진, 이종현 등이 참석했다. 농대 쪽은 1984년 이후에 이병호(75학번)가 참석했다. 문화 쪽은 학번 상관없이 별도로 연성수가 애오개소극장 문화패들과 연결되어 집행부 겸 기대 역할을 맡았다.
역전의 노장이 많았던 고대와 연대고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인적 자원이 많은 그룹이었다. 조성우와 박계동이 초기에 고대 출신 인맥들을 민청련과 조직적으로 연결하려고 시도했지만 오랫동안 내려오는 학교 이념서클의 인맥들을 모두 다 커버하기 어려웠다. 그런 데다 1983년 10월 조성우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박계동도 집행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부 조직 작업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범영, 김도연 등이 나서서 선배 그룹 쪽은 한경남(68학번)으로, 그 아래 후배 쪽으로는 이범, 고성국, 정경연(이상 75학번), 이승환(76학번) 등을 접촉하여 조직적 연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후배 쪽은 현장론이 강한데다 내부 논의가 복잡해 본격적으로 민청련과 조직적 연결이 이루어진 것은 1984년 이후였다.
연대는 선배 쪽은 최민화(연대 69학번)와 홍성엽(연대 73학번)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민청학련 사건 때 함께 옥고를 치른 김학민(67학번), 송무호(71학번), 송재덕(73학번), 고영하(71학번)와 고영하의 의대 후배 몇 사람, 문병수 등과 개인적으로 연결했다. 이들은 모임을 하면 반드시 회비를 걷었고 이를 민청련에 전달했다.
그러나 후배 쪽은 홍성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4년까지도 거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현장론이 강해 공개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참여를 결정한 성균관대성대는 비교적 빨리 '기대'에 참여했다. 장준영(73학번)이 중심이 되어 비교적 일찍 내부논의를 정리하고 1983년 10월 말에 조직적으로 민청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성대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김도연이었다. 김도연은 1983년 7, 8월경 성대 쪽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장준영이 성대의 핵심인물이라고 파악하고, 전화를 걸어 만난다. 김도연으로부터 공개청년단체 논의를 처음 접한 장준영은 그것이 어느 정도 실효성 있는 논의인지 몇 번 더 신중하게 확인했다.
당시 성대는 전투적인 학생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주류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론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배 그룹은 이 문제에 대해 성균관대 학생운동 조직 전반에 집단적인 논의로 부쳐, 창립총회 직전인 9월 하순에 천마산에서 전체 회동을 가졌다. 참석자는 장준영, 김수길, 김희상, 최영삼, 탁무권, 이순동, 김찬, 최금희, 이현배, 민병두, 최경환, 이헌필 등 72학번에서 80학번까지 약 20명이었다.
이 모임에서 장시간 논의 끝에 '민청련이 변혁운동의 중심이 될 수는 없으나 당면 운동에 필요한 조직이니 참여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성대 대표로 기대에 장준영이 참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9월 30일 창립총회에는 시일이 촉박하므로 내부적으로 좀 더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조직적인 참석은 보류하고 78학번 이현배만 개인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창립 한 달쯤 뒤인 10월 말부터 기대 모임에 장준영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화여대에서는 최정순(75학번)이 기별대표로 참석했으나, 조직적 논의 단위 형성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졌다. 중앙대에서는 이명준(68학번), 이석표(73학번)가 옵저버 자격으로 부정기적으로 참석했다.
모든 중요 결정은 '기대'에서민청련 창립에서 '기대'(기별 대표조직)는 일종의 대의원회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기대의 조직 위상이 집행위와 상임위보다 상위에 있었다. 모든 중요한 문제의 결정이 이 '기대'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민청련의 조직 명칭이라든지 기관지 '민주화의 길'의 명칭도 이 기대회의에서 결정했다.
중요 집회라든지 집행부에서 발표하는 성명서나 문건도 반드시 이 기대회의를 거쳤다. 이런 권한에는 그에 상응한 책임이 따랐다. 우선 기대에서는 각 단위조직을 통해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거두어 집행위에 전달해야 했다. 전체 운영경비의 1/3에서 1/2 정도가 이 기대에서 거두어들이는 회비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기대모임은 중요 집회에 인원을 동원하는 일도 맡았다. 당시 시위 주동자를 '야전사령관'이라는 뜻에서 '야사'라고 불렀는데, '야사'를 선정하는 일도 기본적으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성대가 참여한 뒤 10월 말경에 열린 기대모임에는 대략 15~20명 정도의 기별대표가 참석했다. 서울대가 7~8명 정도로 제일 많았고, 연대, 고대, 성대, 이대가 1~2명, 그 밖에 2~3개 대학 출신들이 옵서버로 참석했다. 김근태 의장 등 집행위에서 2~3명, 상임위에서도 이해찬, 이을호 등 1~2명이 배석했다.
모임은 주 1회 정례모임을 갖는 걸 기본으로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주 2회 이상 모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기대모임에 자주 나와 국내외 정세분석과 활동상황 보고했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은 '기대'의 자율적 논의에 맡겼다. 이런 김 의장의 민주적 조직운영은 기대의 책임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기대'의 운영 책임은 창립 초기에 김도연과 이범영이 주로 담당했고, 성대가 참여하고 나서 11월 초부터는 장준영이 여기에 가세했다.
기대 모임은 대외적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비밀 조직이어서 모이는 시간과 장소도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썼다. 주로 모임장소로 종로 2가 이문설렁탕 등을 이용했다. 기대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자영업, 회사원 등 다양했지만 집행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직장인이 많았다. 한번 모이면 회의가 3~4시간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 자정을 넘기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모임의 열기가 뜨거웠다.
기대의 역할은 기대모임 참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기대의 논의 결과를 자기가 속한 기별, 또는 대학별 모임에 전달하고, 회비 수납, 인원 동원, 중요문제에 대한 의견 수렴 등을 해야 했다. 그래서 기대는 보통 1주일에 2~3일은 민청련 활동에 자기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조치 발표 이후 민청련 조직원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기대모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상근직으로 월급도 받은 집행 간부들 민청련의 대외적인 활동은 집행위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김근태 의장의 주재로 장영달 부의장, 박우섭 총무부장, 박계동 홍보부장, 홍성엽 재정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6명의 집행위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아침 조회를 열었다. 퇴근은 저녁 6시였다.
김근태 의장은 온유한 성품이었지만 상근 간부들의 근무 기강을 세우는 데는 엄격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 김근태 의장을 형처럼 따랐지만 한편으로 어려워했다. 장영달 부의장이 때때로 옥중투쟁, 교도관들과 싸운 무용담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안기부, 치안본부 등 민청련 담당 기관원들과의 교섭 창구는 박계동이 맡았다. 박우섭은 부지런히 재야운동과 민청련 내부조직을 오가며 일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홍성엽은 성품대로 언제나 말없이 사무실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조용히 꾸려나갔다. 연성수는 주로 노동현장 쪽과 연결하며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서 사업 전반에 활력을 주었다.
집행위 간부는 모두 상근직이었다. 민청련은 집행 간부의 상근화를 위해서 최저생계비 수준이지만 고정급여를 지불했다. 급여체계는 간단했다. 연령에 상관없이 월 10만 원을 기본급으로 하고, 기혼자는 10만 원을 추가하고, 자녀가 있을 경우 2명까지 1인당 각 5만 원씩 추가해 최대 20만 원까지 가족 수당을 지급했다.
단, 부인이 돈을 벌 때는 5만 원을 삭감했다. 예를 들면, 기혼에 자녀가 둘이 있으면 30만원을 받았고, 부인이 돈을 벌 경우 25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지만, 이 급여는 집행 간부들이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근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노고가 숨어있었다. 특히 '기대'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1만 원씩의 회비를 모아 10-20만 원 정도씩 꼬박꼬박 박우섭 총무에게 전달했다. 박우섭의 회고에 의하면 창립 초기 급여를 포함하여 매월 400~500만 원 정도 운영비가 들었는데, 그 중 대략 1/3은 회비, 1/3은 후원금, 1/3이 수익사업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정책 기능을 담당한 상임위원회상임위원회는 원래 집행위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는 사태에 대비해 2진 개념으로 조직했지만, 집행위가 안정을 찾으면서 주로 정책 기능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사무실과 상근자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활발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정기적으로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모임 장소로는 주로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의 돌베개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했다. 최민화 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부의장 등 4-5명이 모여 토론하고, 정세분석 등의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 초안 작성은 주로 이을호가 맡았다. 이을호는 당시 출판사에 간부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저녁 시간을 거의 전적으로 상임위 활동에 투여하다시피 했다. 1984년부터는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 인력도 충원하면서 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