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
드르륵 갈기니 후드득 스러졌다. 난데없는 총질이었다. 영문 모른 채 도망가다 이유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1961년 11월 부산 자갈치시장 옆 창녀촌, 한 두 발의 총성이 아니었다. 정영철씨 하숙집 지붕이 날아갈 기세였다. 쾅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다짜고짜 "움직이면 쏜다"고 했다. 자다 봉변당한 정씨 눈에 기관총을 들고 군복 입은 자들이 보였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숙집 근처 똥물이 흐르는 도랑으로 도망간 이들의 다리가 푹푹 꺾였다. 이유나 알자 물으니 "깡패 새끼들이 무슨 이유가 있냐"고 했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포승줄에 굴비 엮듯 줄줄이 묶여 끌려간 곳은 부산의 한 수용소였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깜깜한 밤, 어디선가 끌려온 200여 명이 또 다시 버스에 구겨 넣어졌다. 버스에는 경찰이 함께 탔다. 커튼까지 쳐져있었지만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렸다. 전라남도 장흥이었다. 팬티만 입은 채로 버스에 내리자 매타작이 쏟아졌다. 몽둥이에는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이라 적혀있었다.
지난 9월 6일 마주한 정영철(76)씨는 손을 어깨너비만큼 펼쳐보였다. "부러지지도 않은 이따만한 막대기가 그의 엉덩이에도 꽂혔다"고 했다. 50년도 더 된 장면을 그는 어제 일처럼 털어냈다.
"설치고 다니며 무서운 게 없던 것들이 바로 꼬랑지 내렸지. 대가리만 들면 패니께. 맨발로 그 뒷산에 오르게 시키는데, 김이 뽀얗게 나는데 계곡에 다 들어가라는 거여. 묵은 때 벗기고 정신 차리라고. 무지하게 춥더라고. 이게 내 발인지 누구 발인지."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깡패, 넝마주이, 고아들이 모였다혹독했던 겨울, 그는 다시 충청남도 서산으로 옮겨졌다. 62년 2월, 그의 나이 이제 스물 하나였다. "남포동 삼분지 일"을 주름잡았던 건달, 정씨의 독기도 빠졌다. 그만큼 혹독하게 맞았다. 정권을 잡은 지 1년도 안 된 서슬 퍼런 박정희 시대였다. '사회 명랑화 사업'을 내건 박정희 정권은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깡패, 넝마주이, 고아들을 한데 모았다. 무임금 노동에 동원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바닷물이 잘박 거리는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다. 일제시대 때 염전을 만들기 위해 제방만 세워 놓은 곳이었다. 제방마저도 무너진 곳이 태반이었다.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263만8884㎡(80만 평). 그들이 다져야 할 땅은 "저~짝부터 저~짝까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에 나는 뻘건 나문재 풀이 깔려있고 한 가운데는 갯고랑이 저 위까지 돼있고. 그냥 황무지 그 자체였지."종로 주먹들이 윗대가리였다. 군기를 바짝 잡았다. 감시도 철저했다. 삼엄한 공기 속에 돌을 지어 날랐다. 바닷물을 막기 위한 둑을 쌓고, 수로를 파고, 길을 냈다. 말보다 한숨이 앞장선 채, 정씨는 학을 뗀 듯 고개를 저었다.
"돌이라면 아주 징글징글하지. 시원찮게 들면 괘씸죄로 뚜드려 맞아. 간신히 짊어 멜 정도로 무거운 거 50~60kg 짜리를 혼자 짊어야지. 저 도비산에서 짊어 메고 3km를 걸어온다고 생각해봐.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왔다 갔다 했어."수로를 파 놓으면 다음 날 또 왕창 무너졌다. 그럼 또 파는 수밖에. 장비라고는 삽 한 자루와 두 손이 다였다. 중대별로 '50미터'가 목표로 떨어지면 죽어도 끝내야 했다. 감독관이 와서 작업량을 확인한 후 쥐어 터지는 게 일이었다. 작업이 끝나도 맘 편히 쉴 수 없었다. 혁명공약 외우기가 과제였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정씨는 녹음기 버튼을 누른 듯 줄줄이 혁명공약을 읊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내가 초등학교도 못 나와서 무식한디 이것만은 안 잊어. 그렇게 외게 시켰어."
'개죽음'이 일상..."지랄맞게 태극기는 왜 덮어?"처음에는 움막에서 자다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집에서 생활했다. 한 방에 서넛씩 들어앉아 포개 자다시피 했다. 최고로 서러운 건 배고픔이었다. 그 때 낙이라고는 "저녁밥에 콩 한 개라도 더 들어갔을라나"였다.
"영화 보믄 개구리, 뱀 잡아서 먹자녀. 그거 다 진짜여. 개구리가 산에 남아나질 않았어. 다 날로 뜯어 먹었지. 아무 것도 안 넣은 소금국에 고봉밥을 먹었어. 그런데도 돌아서면 배고팠어. 하루 종일 중노동을 하니께." 쌀이 떨어진 날이면 한 나절 걸리는 거리를 계속 걷게 했다. 땡볕에 쓰러질까 소금물만 줬다. 잡생각이 들지 못하게 몸을 굴렸다. 안 맞으면 옴팡지게 재수 좋은 날이었다. 밤에 변소도 혼자 못 갔다. 5명이 무리 지어 "2대대 1중대 정영철 외 4명 소변 보러 갑니다" 보고를 하고는 변소 앞까지 "하나, 둘, 셋"을 외치며 갔다. 소리가 끊어지면 돌이 날아왔다.
"거짓말 같지? 실화여. 북한 영화 보면 포로들이 저거하게 생활 하자녀. 난 그런 영화 볼 때마다 그려. '저것들은 우리보다 괜찮네.'"오죽하면,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며 자신의 성기를 자른 사람도 있었다. 부러진 삽을 돌멩이로 문질러 날카롭게 만든 후 잘랐다고 들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치료를 위해 개척단을 떠날 수 있었다. 그 길로 떠난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개죽음'이 쌓여갔다. 정씨가 목격한 죽음만 해도 수를 셀 수 없었다. 굶어 죽었고, 앓다 죽었고, 무너진 둑에 깔려 죽었고, 맞아 죽었다.
"주먹잽이들이라서 맞으면 충격이 어마어마하지. 궁둥이 툭툭 터지고 피가 질질 나도록 맞아. 나도 친구놈들 도망가는 거 도와주다가 걸려서 뒤지게 맞았어. 도망가다 걸리면 본 뵈기 보여주듯이 패 죽이는 거여. 공포심 갖게 하려고. 그야말로 짐승 취급 당했어. 그래놓고 뒤지면 태극기 덮어놔. 지랄 맞게 태극기는 왜 덮어... 떼로 공동묘지에 묻으면 끝이여." 모월리 '희망공원'에는 이름 없는 무연고자들의 무덤이, 그래서 그득하다. 슬픈 표시만 내도 "너 쟤 알아?"라며 다그쳤다. "괜히 아는 척했다 뒤질까봐, '잘 죽었네요'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고 했다. 누구하나 마음 놓고 슬퍼하지 못한 죽음이 숱하게 묻혔다. 몇 년 전까지 그는 무연고자의 위령제를 지냈다. 이제는 죽은 친구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졌다.
"갱생의 마을", 정부는 생지옥을 이렇게 포장했다끌려온 이들은 갈수록 늘었다. 1961년 11월 68명이던 숫자는 1964년 1771명이 됐다. "악몽 속에서 깨어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갱생의 마을." 정부는 이 생지옥을 이렇게 포장했다. 사회의 부랑아들을 '계도'해 새 삶을 살게 했다고 언론을 빌어 홍보했다.
그러나, 기세가 하늘을 찔렀던 개척단에 균열이 시작됐다. 1966년의 일이다. 우두머리 민정식 단장의 오른팔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시발점이었다. 민 단장은 도망갔고 조직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박정희 정권이 전국에서 벌인 '개척단' 사업들도 하나 둘씩 소멸 국면에 들어섰던 때다.
서산 개척단 단원들은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까지 5년여 동안 친부모와 같이 믿고 의지하고 살아온 저희들의 단장이신 민정식씨께서는 운영방법이 너무도 허술하며 (중략) 자기 사재로 이끌어가는 단체인양 모든 운용을 '팟쇼' 식으로 농지개간을 비롯한 운영 문제에 이르기까지 도외시하고 운영 매금 일체를 자기 수중에서 낭비하는 등 (중략) 저희 자신들은 다시금 암흑 속으로 뛰어 들게 될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1966년 6월 개척단원들이 청와대에 보낸 탄원서 일부-정씨는 사람들을 모았다. 몇몇을 이끌고 감독관에게 갔다.
"자유를 주든지, 죽이든지 해주시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못 살겠습니다."'쿠데타냐'는 반응이 처음이었다. 정씨가 나오지 않자 밖에서는 '죽이지 마라' 함성이 들고 일어났다. 진정시키려 애쓰던 간부들의 마지막 선택도 도망이었다.
무너지는 둑을 막을 수 없듯 민 단장 체제는 와해됐다. 1966년 9월 서산개척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운영권은 서산군수에게 넘어갔다. 1968년 서산군수는 1세대 당 1정보(3000평)를 가분배했다. 끌려올 당시 20살이던 그는 그 때 나이로 27살이 되었다. "짐승보다 못하게 살았"어도, 그의 앞에 3000평이 남았다. 높으신 분들이 말로만 얘기했던 땅 분배의 약속이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으로 증명됐다. 그걸로 됐다.
그러나 그 피 같은 땅이 '내 땅'이 아님을 강제로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땅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곳이 '나라 땅'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