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자치가 부활한 지 27년. 그러나 여전히 지역 정치에 관심을 갖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지역 정치는 중앙 정치에 예속되어 버렸다. 또한 대체로 보수 토착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 현실이다.
중앙 정치가 아무리 바뀐다 한들, 정작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역 정치다. 실제로, 중앙 정부가 쓰는 예산보다 지방 정부가 쓰는 예산이 더 많다.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것도 여러 주민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지방 정부를 통해서다. 지방 자치는 그 중요성에 비해 그간 방치되다시피 했다.
중앙 정치보다 더 고여 있는 물, 지역 정치
최근 출간된 <지방자치 새로고침>(윤병국 지음)은 지방 자치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우리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소중한 교양서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지역 정치의 씁쓸한 민낯을 살펴본다. 그리고 2부에서는 지방 자치를 살릴 대안을 찾는다.
지역 정치권에는 중앙 정치권보다 더 심한 적폐가 쌓여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2014년 지방 선거에서 지방의원 당선자 가운데 무려 36%가 전과자다! 이 책은 지방의원 전체 당선자 3952명 가운데 1418명이 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으며, 전과 3범 이상의 후보도 260명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질이 떨어지는 시의원들이 많은 상황에서 과연 이들이 어떻게 의정 활동을 할까? 이 책은 그 모습도 보여준다.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준비가 없이 의원이 돼도 두려워할 일이 별로 없다. 정당의 보호막에 숨어 당론에만 충실하면 우수한 의원은 못 되어도 무난한 의원 생활은 할 수 있다. 전문지식이 부족한 것은 후견인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을 잘 고르고 언론인을 잘 사귀면 충분히 보충할 수 있다. (…) 과외를 받은 의원이 준비된 원고를 줄줄 읽으면 그 원고를 써준 언론인이 방청하여 대서특필하기도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공무원에게는 인사문제를 챙겨줘야 하고 언론인에게는 이익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75쪽)이렇게 이 책을 통해 처참한 지역 정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부천 시의원으로 11년째 활동해 오고 있다. 시의원이 되기 전에는 시민단체 활동도 해왔다. 덕분에 오랜 경험을 통해 체감한 지방 자치의 현실을 속속들이 그려낸다. 또한 '동료 의원들에 대한 내부 고발' 덕에 지역 정치의 현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는 이 책만의 장점이다.
나아가 저자의 오랜 경험은 이론과 지식·건강한 민주주의 시각과 합쳐져 빛을 발한다. 특히 1부에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통계 자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광역지방자치단체 의회와 기초지방자치단체 의회의 '일당 독점'과 '거대 양당 나눠먹기'를 지적한다. 지역 정치가 '고인 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왕적' 지방자치단체장, 토착 세력과 보수 카르텔 형성자질 없는 시의원이 많다는 것도 난처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이 더 문제가 된다. 일단, 그 권한이 막강하다. 저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이 가히 '제왕적'이라고 지적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제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닐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공무원 임용과 승진을 주관하는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으며, 예산편성권을 거의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지방의회가 예산을 심의하고 의결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삭감할 권한만 있을 뿐이며, 의원들의 지역구나 이해관계에 따른 예산편성을 빌미로 '관리'가 가능하다. (…) 도시계획과 관련해서는 시의회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65~66쪽)이렇게 단체장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간혹 양식 있는 단체장이 들어서 주민을 위한 행정을 펼칠 수 있다고 해도, 이런 제도에서는 언제든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토착 세력과 보수 카르텔을 형성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지방토착세력과 결합하여 각종 개발정책에 목숨을 건다."라고 지적하며, 이어 "어느 정당 소속 후보자가 당선되어도 마찬가지다"라고 강조한다.
또 지역 유지를 비롯한 지방 토착 세력도 단체장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토착 보수 세력들은 언제나 집권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려 하며, 그래야 집권세력의 개발정책을 유도하여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어느 정당이든 토착 세력과 보수 카르텔을 형성할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지방 행정에 무관심한 상황에서 지역의 상황을 훤히 파악하고 있는 이런 보수 카르텔이 선거 때의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이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다음 선거가 바로(!) 4년 뒤에 다가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능동적으로 함께할 수밖에 없다."(69쪽)한편 시장, 군수 등 자치단체장이 뇌물을 챙겨 구속되는 것을 보는 일이 낯설지 않은 현실이다. 이 책을 통해 지역 정치의 민낯을 보게 되면 지역 정치에 부정, 비리, 부패가 끊이지 않는 배경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리고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도 생긴다. 정당은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 저자는 지역 정치에 있어 "정당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목소리 높여 비판한다.
주민이 자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책을 읽다 보면 때로 분노 지수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역 정치가 아직도 이 모양이라는 점은, 건강한 시민과 건전한 비판 세력이 지역마다 자리 잡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우리의 무관심'이 낳은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저자가 이 책의 2부에서 제시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선거 제도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이 자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현 선거 제도가 대표성의 왜곡을 가져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다는 지적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저자는 한 나라가 어떤 선거 제도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정치의 모습이 바뀐다며, 내년 지방 선거에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면 지금보다 정치가 많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제도 개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주민 자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추첨 민주주의와 숙의 민주주의를 적극 활용한 대안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면, 주민참여예산제 활성화, 주민자치위원회 개혁, 시민배심법정 도입, 원탁토론 도입 등이다.
이들은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시민의 직접 참여를 넓혀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좋은 방안이다. 그리고 이는 촛불 항쟁의 요구와도 맥이 닿으며, 무엇보다 진정 주민 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들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 중에서 먼저 '주민참여예산제'를 보자. 우리나라에서 모든 지자체에 주민참여예산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지자체마다 천차만별이다. 저자는 "운용 방법이나 기능 등 세부 내용에서는 차이가 많았다"고 말한다. 주민이 제안한 사업을 형식적으로 검토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주민 제안 사업의 공정한 검토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전체 예산을 미리 보고받고 의견을 내는 곳도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예산을 사용할 사업을 결정하고 시 예산을 심의하며 그에 관한 의견을 내는 일은 멋지지 않은가! 저자는 주민참여예산제의 권한을 확대하고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주도 주민자치위원회, 수원시 시민배심법정 확대·발전시켜야이어, '주민자치위원회'는 전국의 모든 읍·면·동마다 설치된 자치 기구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기능과 권한이 없고, 폐쇄적이어서 새로운 사람의 진입을 쉽게 허용하지 않으며, 게다가 지역 유지들이 모인 단체 정도로 인식되기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현실 속에서 제주특별자치도의 주민자치위원회 구성은 특별한 점이 있다"며 지면을 할애해 소개한다. 제주도 주민자치위원회는 지역개발 계획, 주민이해 조정, 주요사업 예산 제안 및 의견 제출, 시민교육 계획 수립 및 추진 등 여러 주민 자치 사항을 심의하고 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 즉 일정 정도 주민 자치 권한을 지니도록 개혁했다.
또한 주민자치 위원을 주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었다. 즉 제주도 주민자치 위원의 절반은 추첨(제비뽑기)으로 뽑아 민주적 참여 절차를 갖추었다. 지역 유지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주민이 다양하게 참여해 그들의 목소리가 골고루 반영되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제주도 주민자치위원회 개혁 사례를 들어 이렇게 주장한다.
"주민자치위원회를 새로운 근린자치기구로 변화시켜 주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참여민주주의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적절한 기능을 부여하고 자치 권한을 보장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에 병행하여 주민자치위원회 구성 인원을 대폭 늘리고 공개모집·추첨 등의 방법을 통해 민주적 참여 절차도 보장해야 한다."(148쪽)한편, 최근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공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거나 의견이 분분하여 큰 갈등을 낳는 사안에 대해, 지방 정부에서도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넘어 주민이 직접 참여해 세미나와 토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까? 관련해 저자는 수원시 '시민배심법정' 운영 사례도 소개한다.
책의 소개에 따르면, 시민배심법정은 시의 주요 시책이나 집단 민원, 장기 미해결 민원,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민원 등에 대해 시민배심원을 추첨으로 뽑아 논의하도록 한다. 사법 배심제와 유사한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공공갈등을 시민 참여로 조정하는 기구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선행사례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며 잘 연구하여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며 관심을 요구한다.
우리의 삶의 질은 주민 자치 역량에 달렸다이 책은 여기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지방 의회 개혁을 위한 실효성 있는 대안과 주목할 만한 자치의 사례들도 제시한다. 지역 정치의 현실을 비판하며 지방 자치 혁신의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이 책은 내 삶을 위한 우리의 지방 자치로 안내해 유익하다.
만약 <지방자치 새로고침>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처럼 될 것이다. 지역 정치를 바꿔 우리의 삶의 질이 좋아지려면, 결국 시민의 자치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하승수 변호사의 말을 옮긴다.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정치가 가능한 공간은 일차적으로는 지역일 수밖에 없다. 내가 구경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일차적으로는 지방자치에 있다."(8쪽) 덧붙이는 글 | 지금이라도 주민 자치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이라면, 먼저 ‘주민참여예산제’에 참여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잘 활용하기만 하면 무척 좋은 제도로,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며, 예산 교육도 해주어 주민 자치의 학교 역할도 하고, 게다가 수당도 제공한다. 직장인도 5일 정도 연차를 사용하면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모여야 힘과 지혜가 생긴다. 꼭 ‘지역 시민단체’에 가입하자. 참여로 세상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