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든 쓰기 전에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독자'가 누구인지를 특정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사실, 독자를 특정하지 않고 아무나 읽도록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특정다수를 독자로 삼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매스 미디어'(대중매체)조차도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주독(시청)자층을 특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사를 쓸 수 없다.
가령, 요즘 한창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보자면, 모든 국민이 이 뉴스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다수의 국민이 관심을 두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들은 열심히 이 사건에 대해 다룬다. 왜일까? '모든' 국민은 아니더라도 '다수'의 국민(독자)을 독자층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쓰려는 글의 독자층은 이보다 훨씬 좁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 독자층을 특정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도 독자층을 분명히 설정하고 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그러나 글쓰기에 두려움이 있는 글쓰기의 초보자'가 내가 특정한 독자층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내 글의 독자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글쓰기에 관한 그 어떤 팁이라도 이미 잘 알고 있는 글쓰기의 고수들로, 나름의 글쓰기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해서 다른 사람의 글쓰기 팁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되레 이런 글이 제대로 안내하고 있는지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이 글을 읽지 않는다.
한때 신문들이 서평을 게재하면서 앞다투어 전문가들에 서평을 의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문가들의 서평이 독자들에게 외면받으면서 원고료만 많이 들어가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었다. 왜 그랬을까.
서평 쓰기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독자층을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어쩌다 주어진 지면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기회로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사용하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가며 서평의 대상 책이 다루고 있지 않은 내용까지 거론했다. 그들은 정말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났다. 많아야 200자 원고지 10매 남짓한 분량의 서평에 모든 것들을 다 꾸겨 넣었다.
그러나 이 서평은 자신은 만족했을지라도 독자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았다. 독자층을 특정하지 않은 탓이다. 일반 독자들은 어려워서 못 읽고, 전문가들은 싱거워서 안 읽었던 것이다.
이 예에서 보듯 독자를 특정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독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쓸 내용도 표현 방법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독자가 없는 글은 있을 수 없다. 혹자는 발표할 계획 없이 단지 나만 혼자 보기 위해 쓴 일기나 자서전과 같은 글의 경우에는 독자가 없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혼자 보기 위해 쓴 일기나 자서전이라 해도 결국 자기 자신은 읽지 않는가. 읽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나 자신만이라도 독자는 독자다. 따라서 어떤 글이든 반드시 독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독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글쓰기 방식이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당위가 생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들에게 학년을 마무리하면서 편지를 보낸다고 해보자.
이럴 때 1년 동안 학급에서 있었던 일들이 중심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금 범위를 넓힌다 해도 학교 차원, 나아가 국가 차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다만 학교나 국가 차원의 이야기라 해도 반 학생들에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련이 있는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이 글에 집어넣는다고 하면 과연 학생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얻겠는가.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릴 적 일기 쓰기 방학숙제를 개학 하루 전날 몰아서 썼던 추억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해보자.
읽는 이가 자식들이거나 혹 손자 손녀라고 하면 아마도 이런 식으로 서술할 것이다.
"그땐 일기 쓰기가 참 고역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좋은 자기 성찰의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일기를 쓰면 나중에 한꺼번에 억지로 쓰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거짓말을 만들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니 너희들도 꼭 일기는 매일 쓴다는 생각으로 실천해라."
공자왈맹자왈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친구들과 이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교훈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는 당연히 없을 테고, 그 일로 빚어진 갖가지 추억들을 떠올리며 깔깔거릴 것이다. 남의 일기 훔쳤다가 들통 난 일, 날씨를 잘못 적어 한꺼번에 쓴 게 들통 난 일, 쓰지 않았음에도 깜박하고 안 가져왔다고 둘러대다 내일까지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밤새 낑낑대고 써갔지만 한꺼번에 쓴 것이 들통 난 일, 이런 것을 추억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이렇게 읽(듣)는이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소재라도 내용이 달라지고, 이야기 방식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를 특정하는 것은 글쓰기에서 기본이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독자층에 따른 표현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사항이 있다.
독자층이 어린이인데도 어른들이 사용하는 단어나 글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해지겠는가. 그 반대로 어른이 독자인데 어린이들에게 하듯 쓰면 유치해서 안 읽을 것이다.
이처럼 글을 쓸 때 독자층을 특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갈무리하면서 독자층과 관련한 표현 방식에서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거친 주장 하나를 이 기회에 얘기해보겠다.
특정 지역의 독자층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 굳이 서울에서 사용하는 표준어로 사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표준어를 사용한 표현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난히 소통된다는 이유에서 글을 쓸 때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특정 지역의 표준어는 특정 지역의 말글이 아닐까. 경상도라면 (서울의 말글살이를 기준으로) 경상도 사투리가, 전라도라면 전라도 사투리가 그 지역의 표준어가 아닐까.
그렇다면 특정 지역의 독자로 특정된다면 특정 지역의 사투리로 글을 써야 한다는 당위가 생긴다.
글의 본질이 무엇인가. '뭔가를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글자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서울 사람이 경상도나 전라도에 가서 사투리를 접하면 다 알아듣지 못하고, 반대로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이 서울에 오면 서울말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때로는 통역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특정지역의 독자들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특정 지역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의 표현에서 그 지역의 말글살이 특성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 한 번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 '조성일의 글쓰기 충전소'에도 포스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