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오늘은 인권활동가로 사는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47살. 갱년기에 접어든 아줌마다. 생긴 건 평범한데 하는 일은 별로 평범하지 않다. 내 일이 평범하지 않은 건, 소위 평범한 일상 범주의 사람들과 대면할 때 깨닫는다.
"우리 엄마 촛불집회 사회보시는데요...""뭐 하세요?"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한 날 트레이너가 물었다. "인권단체 있습니다"라고 하면 꼭 한 번 더 되묻는다. "이권이요?" 인권이란 이권보다 낯선 단어다. "뭐하는 곳이에요?"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힘들고 대충 설명하기도 힘들다. 아무렴 스쿼트나 심지어 런지 자세로 그런 질문 받으면 대답하기 얼마나 숨이 차겠는가.
학부모로 찾아간 학교에서도 그랬다.
"어머님 하시는 일이 무엇이세요?" "네. 인권활동가입니다." "오늘 참 날이 맑지요?"라는 질문에 "오늘은 서해상에 위치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전국이 대체로 맑겠으나, 서울 경기도와 강원영서는 밤에 구름이 많아지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느낌이랄까? 직장 다닙니다. 작은 액세서리 가게 운영합니다. 시청에서 근무합니다…. 이런 대답과 톤이 다른 것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몇 해 전, 등록한 체육관 관장님은 등록 첫 날 한 시간 반 동안 "제 평생 이런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를 연발 하시며 어찌나 깊은 호구조사를 하시던지. 18살 고등학생 딸은 학기 초 "느그 엄마 뭐하시노?"라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엄마 촛불 집회 사회보시는데요…." 대답이 끝나자 약 1분간 정적이 흘렀다 하니, 담임선생님은 얼마나 당황하셨던 것일까? 일상성이 배제된 것만 같은 직업과 사람들, 그게 인권활동가라면 과장된 것일까?
박근혜 당선, '결국 감옥가지 않겠냐'
박근혜가 당선되던 날, 밤 새 울었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가 불러올 비극이 예상되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친한 선배는 그 새벽 비슷하게 우는 목소리로 전화를 하더니 급기야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비장했다.
'우리 진이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 문장의 요지는 대충 그랬는데, 뜻을 풀이하자면 '니가 이번 정권에서는 결국 감옥 가지 않겠느냐'는 말로 읽혔다. 감옥보다 더 무서운 것은 눈덩이처럼 줄지 않을 일의 크기였고 절망의 크기였다.
눈앞이 컴컴했다. 쌍용차 해고자들, 강정 마을 주민들이 떠올랐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세상이 바뀔 것 같냐고 큰 소리쳤지만 박근혜 당선은 피를 말렸다.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이 또 시작되는 것이다. 이명박 내내 지긋지긋했다. 자유와 평등의 전선은 뒤로 밀리고 밀렸다.
새로운 상상은 자라날 틈이 없었다. 경찰과 싸우고 검찰과 싸우고 국정원과 싸우고. 벼랑 끝에서 두 팔 벌리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 염려는 결국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당선 직후 노조탄압과 정리해고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몸을 던졌다.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신의 몸을 벼랑 아래로 밀었다. MB정권 내내 고통받았던 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스러졌다.
당시에 결심이라는 것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 보지 않은 일을 해 보자! 성명서 쓰고 기자회견하고 집회하고 경찰 방패 앞에서 결사 항전하는 것 말고, 다른 일! 사람들이 죽고 쫓겨나고 울부짖는 순간은 항상 뒤늦었다. 그들의 선택이 최악을 향하지 않는 곳을 향해 가보자. 나름 비장했다. 그 선택이 바로 평범한 일상에 침투하기였다.
일상으로의 침투, 시도해봤지만...학교 운영위원을 신청했다. 마을 도서관의 강좌를 신청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삶의 현장을 바꿔야겠다 생각했다. 중학생이었던 딸 아이 반의 부모회장을 맡았다. 반장 엄마도 아니고 1등 엄마도 아닌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해야 하니까.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바쁜 리듬이 바뀌지 않으니 소소하게 사람들과 나눌 일상은 생기지 않았다. 한 달 한 번 회의 참석하는 것도 빠듯했다. 일상을 나누며 변화시키기에 내 속도는 턱없이 빨랐다. 가끔 참석한 회의에서 늘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 앞에서 학생들 복장 단속하는 문제로 엄마들과 12대 1로 설전을 벌인 일도 있었다. 그것도 카톡에서.
수학여행을 왜 영어마을로 가야하느냐, 아이들이 편하게 놀러 가면 안되느냐, 교복을 꼭 입혀야 하느냐…. 하는 말은 맞는지 모르겠으나 현실성은 없고 타인을 설득하기엔 실력과 신뢰를 갖추지 못했다. 밥 한끼 같이 못 먹도록 바쁜 주제에, 가끔 와서 하는 잔소리가 먹힐 턱이 없었다. 또는 불편한 식사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평범한 일상이라 불리는 것들과 마주하자 인권활동가는 한없이 작아졌다. 퇴각을 결정했다. 내 속도와 삶의 방식이 변하지 않는 한, 이번 시도는 실패라고 결론 지었다. 왜 이렇게 장황설이 늘어졌을까…. 허술함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일까.
하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권문제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인권 이슈가 발생한 사람들과 연대할 사회 시스템이 없을 때 생긴다. 국가와 사회가 기능하지 못할 때 벼랑 끝의 사람들은 구조 받지 못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시스템이 흔들려야 한다. 인권을 옹호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여전히 문제는 일상에 있다. 지금의 인권운동은 발생해버린 인권문제를 뒤쫓는 것만으로 급급하다. 내 활동의 태반이 그렇다. 그렇게 해서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인권활동가의 책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또 도전할 생각이다. 어떻게 도전할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덤빌지는 아직 5년째 구상 중이긴 하지만. 해보지 않은 게 더 많으니 미래는 풍성하다.
"인간다운 삶 힘든 인권활동가…열 중 넷 '월급 100만원' 안돼" 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2015년이었다. 그 이후 불쌍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권이즈커밍' 기획에 불만이 많았다. '운동가가 존경은 못 받을망정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 그렇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아직도 배가 덜 고픈가 보네, 허세 쩐다. 그러시려나. 그러나 진심으로 그렇다.
'그들을 도와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들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권 이야기' 들려주는 할머니 꿈꾸며
빙하에 갇혀 위기에 처한 회색 고래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선 사람들의 실화를 담은 영화 '빅 미라클'에 나오는 대사다. 인권활동가들이 현장에 있는 이유며, 인권활동가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활동가들 처지의 궁핍함이 불가피한 선택지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권활동이 동정심으로 지지받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인권활동이 누군가의 희생과 대리라 여기지 않는다. 인권활동가 그들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인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격려 받고 싶다. 인권피해자들의 신호가 외면받지 않고, 이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많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권피해자들, 당사자들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인권 당사자들은 위험 신호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치부하는 경우, 그들의 희생은 이름만 다른 피해자들을 끊임없이 만들게 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일 수 없다. 인권 당사자들을 통해 보다 나은 사회로 진입해야 한다. 끊임없이 불화하는 현실의 발화점에서 인권은 발견되고 발전한다. 인권활동가들은 그런 불화 덩어리 인권을, 인권당사자들의 아픔을 모든 이들의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인권활동가라는 직업을 좋아한다. 인권운동이 좋다. 스무살 무렵 세상의 부조리와 마주해 사회운동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세상의 부당함은 알았지만 일상 마디에 맺힌 부조리는 잘 몰랐다. 인권운동하면서 많이 배웠다.
내가 우선 변했다. 활동경력이 많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회적 발언력이 높아졌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많다. 그것이 권력이 되지 않게 긴장하는 것도 인권운동이 가르쳐 주었다. 먼 곳의 평화와 평등만큼 내가 딛고 선 곳의 정의도 중요하게 여긴다. 인권은 불편하지만 괜찮은 것이다. 인권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인권운동의 지지자들이 많아지면 보다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생길 것이다. 희생과 결단을 각오하지 않아도 가치있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런 세상이면 참 좋겠다.
내 꿈은 동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동네 꼬마들을 모아 두고, 야쿠르트 앞에 두고 '인권이야기'를 들려주는 하얀 머리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소망을 이루려면 해야 할 일이 많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같이 해주시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