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홍영미씨는 우리나라를 참 좋아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게 늘 감사했다. 알아갈수록 그랬다. 역사에 관심을 두고 나라의 근원을 찾아갈수록 우리가 참 '위대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에 태어난 게 행운이라 믿었다. 간호사로 일하던 영미씨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방과 후 역사 선생님으로 활동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태생이 서로를 이롭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들인 재욱이에게도 늘 강조했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고. 서로가 서로를 돕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거라고. 재욱이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존재도 소중한 거라고,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재욱이를 키웠다.
재욱이가 환경조경사를 꿈꾼 것에 영미씨의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재욱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좀 더 살기 좋고 정의롭게 만들고 싶어 했다.
나라가 우리 새끼를 죽였다
그 날도 강의가 있었다. 경기도 안산에서 수원으로 가던 길이었다. 차 안에서 강의 주제를 정리했다. 우리 민족이 가진 뿌리 정신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심했다.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이곳의 정신에 관한 것이었다. 너만 중요한 것도 나만 중요한 것도 아닌 공동체 의식이 우리 민족의 뿌리 정신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목포를 향해 내달렸다. 그 후로는 뭐가 어떻게 됐는지 뒤죽박죽이다. 먼바다를 향해 뛰쳐나갔던가, 밤새 발을 동동 굴렀던가, 2학년 8반 엄마들을 만났던가, 곡을 했던가, 내 새끼 어쩌면 좋으냐고 제발 좀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던가.
단원고 2학년 8반 18번, 이재욱을 불렀다. 재욱이가 일주일 만에 뭍으로 올라왔다. 시간이 멈췄다. 그리고 영미씨가 믿던 '우리나라'가 사라졌다. 영미씨가 자랑스러워한 나라가 온데간데 없었다.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 영미씨에게 안산 밖 세상은 낯설었다. 서울은 먼 세상이었다. 남대문도 가본 적 없었다. 그러던 영미씨가 목포를 오가고 서울을 제집처럼 드나들게 됐다. '세월호 특별법 무참히 짓밟은 위법 시행령 원천 무효'라고 쓴 피켓을 들고 광화문 일대를 돌았다. 청와대 근처에서 '대통령님, 제 발 한 번만 만나 달라' 애원한 날도 있다.
전국을 돌았다. 일상이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와 자부심을 말하기 위해 잡던 마이크를 내려놓고, 아이들을 구하지 않은 이 나라의 폭력성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를 붙잡았다. 정부가 내 새끼를 우리 새끼들을 학살한 거였다. 국가폭력이자 학살이었다.
사람들을 만나 간담회를 열고 안전보다 이윤이 먼저인 '세월호'를 고발했다. 재욱이가 얼마나 환하게 웃던 아이였는지 말할 때마다 떠올려야 했다. 간담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사람들은 4월 16일에 대해 묻는데, 그것에 대답을 해주려면 다 떠올려야 해요. 팽목항에서 어땠는지 재욱이가 어땠는지 이 슬픔을 몇 번이고 뱉어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간담회만 다녀오면 한참을 앓았어요.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우리는 피해자인데, 왜 이렇게 전면에 나서서 우리의 슬픔을 아픔을 말해야 하나 속상했죠."이 나라는 세월호에 탔던 이들을 못 구한 게 아니라 안 구한 거였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게 아니라 숨기는 데 급급했다. 영미씨는 풍성했던 갈색 머리를 박박 밀었다.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고 진상을 규명하는 데 목숨을 걸겠다는 뜻이었다. 노란색 바탕에 '진실규명'이라 적힌 띠를 머리에 둘렀다.
내 새끼 하나 기억해 달라는 거 아니야
노란색은 삶의 색이 되었다. 안경테 위에도 노란 리본을 붙였고 손목에 노란 팔찌를 끼고 가방에 옷에 노란 리본을 달고 노란 옷을 입고 살았다.
영미씨는 416 가족협의회에서 대외협력 분과장을 맡았다. 세월호 참사의 진행상황과 부모들의 요청, 정부의 거짓말을 알렸다. 지금은 심리생계 분과장으로 유가족의 마음을 살핀다. 이 모든 것이 내가 그간 타협하며 살았기 때문인가 반성한 적도 있다.
"극한까지 싸워야 하는구나 깨달았어요. 나 때문에 내가 적당히 타협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기며 살았던 게 이 시스템을 만들어 낸 건 아닐까 생각했죠. 저는 이제 타협이란 없어요. 제대로, 적당히 하는 걸 제 인생에서 지웠어요."
영미씨가 활동하는 416 가족협의회가 세월호 참사 2기 특조위를 제대로 출범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유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진상규명 조사를 방해한 사람들의 명단을 발표한 것도 마찬가지다. 참사 당시 어떤 직책으로 무슨 일을 했고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 또렷이 기억하고 세상에 고발하기 위해서다.
4.16 재단을 만들어 안전 중심의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노력도 이 때문이다. 안산 화랑유원지 내에 416 안전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도 내 새끼 하나 기억해달라는 이유가 아니다.
나는 당신 마음을 안다오
영미씨가 기억하는 말이 있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전한 말, 씨랜드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이 전한 말, 대구 지하철 화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손을 붙잡고 한 말이다. 미안하다고. 우리가 조금 더 싸웠어야 했다고, 그랬어야 했다고.
"그때는 그 말이 다가오지 않았어요. 세월호 참사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참사가 같은 모습이라는 건 세월호의 진실에 다가가며 알았죠. 국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건 모든 참사의 특징이에요. 중국 칭다오로 항해하다 연락이 끊긴 스텔라데이지 호도, 19살 청년 노동자가 숨진 구의역 사고도 모두 같은 모습이에요. 안전보다 이윤을 외친 나라, 사람보다 돈을 바라본 시스템의 모습이요."영미씨는 다시 '우리'를 떠올렸다. 영미씨가 세월호의 진실을 말하는 건 영미씨의 인권 활동이다. 국가폭력을 향한 외침을 멈추지 않는 것, 그래서 더 이상의 참사는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만을 밝히라는 것이 아니다. 청와대의 수많은 비서관, 해양수산부의 공무원과 해수부파견 특조위 공무원이 어떻게 권력을 남용하고 침묵했는지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참사의 모양새를 살피고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꼼꼼하게 짚어보는 것이 인권 활동이기 때문이다.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의 진실도 스텔라데이지 호의 진실도 미처 밝히지 못했던 수많은 참사의 진실도 그래야만 드러난다고 믿는다. 시스템을 복원시키며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영미씨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는지 감시하는 것도 인권 활동이라 믿는다. 사실과 진실을 어떻게 다루고 왜곡했는지 지켜보는 활동이다. 공정방송을 외치는 방송사들을 보며 자극적인 보도, 사실 확인이 부족했던 받아쓰기식 보도, 비윤리적인 보도, 권력을 좇던 뉴스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짐했다.
"세월호 보도를 어떻게 했는지 언론인들의 양심선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의 보도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는 지금 하는 MBC, KBS 파업은 의미가 없다고 봐요. 언론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 밝히고 반성해야죠. 이를 지켜보는 것 역시 언론인권활동이라고 생각해요."영미씨는 다짐했다. 엄마로 다짐했다. 재욱이 앞에 고백했다.
"재욱이 앞에서 약속해요. 엄마가 지켜내겠다고. 너를 잃었지만 우리를 잃지는 않겠다고. 남은 사람들의 권리, 남은 아이들의 권리는 어떻게든 지켜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