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가들 '노협'을 창립하다 민청련의 창립은 각 부문운동 전선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민청련 창립이 성공하는 것을 지켜본 노동자, 농민, 기자, 문화예술인, 지식인 등이 앞을 다퉈 공개적인 단체를 창립하고 나선 것이다. 민청련은 이러한 상황을 발판으로 삼아 각 부문운동의 연합체 건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 활동의 중심은 김근태 의장이 맡았다.
부문운동의 연합이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기층이라고 불러온 계급의 운동 즉,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노동운동은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노동자들의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일찍이 1970년에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함으로써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됐지만, 당시 청계천 일대의 봉제공장은 그 규모가 극히 영세해서 사업장 단위의 노조가 구성될 수 없어 일종의 지역노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청계피복노조와는 달리 대규모 단일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정권의 탄압을 받아 붕괴된 사례들이 있었다.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노조에서 성장한 노동운동가들이 1984년 3월 10일, 당시의 노동절에 단체를 결성한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약칭 '노협')가 그것인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단위 사업장 노조지부장으로서 노동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그 주역이었다. 원풍모방의 방용석과 정선순, 한일도루코의 김문수, 동일방직의 이총각, YH의 최순영, 콘트롤데이타의 이영순 등이었다.
노협 사무실은 일반 빌딩이 아니라 서울 신길동의 연립주택 한 칸을 구입해 입주했다. 당시 연립주택은 일반 단독주택에 비해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원풍모방 노조가 탄압으로 쫓겨나면서 남아 있던 조합비로 마련한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의 많은 활동가들이 이곳을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 중에는 김근태 의장을 비롯해 민청련 활동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노협의 창립과 공개적인 활동은 당시 운동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중요한 평가를 받았다. 기본 계급 혹은 기층민중인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근태 의장은 이 노협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부문들이 결합하는 방식의 연대 틀을 구상했다.
'민민협'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하다다른 부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농민이었다. 흔히 '1천만 농민, 8백만 노동자'라고 하던 때였으므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농민운동은 기독교와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보호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가톨릭농민회가 그것이었다.
지식인 단체로는 해직언론인들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있었고, 문화운동 단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출판계와 연극계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늘 운동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각 부문운동을 망라하여 연합체를 만들기 위해 김근태 의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는 동아투위의 이부영이었다. 이들은 단체의 이름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약칭 민민협)'로 정하고, 참가 자격은 개인이 아니라 각 부문운동을 대표하는 자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내 1984년 6월 29일 오전 9시, 서울 돈암동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상지회관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년 전, 민청련이 창립총회를 가졌던 바로 그 장소였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함세웅 신부의 사회로 창립총회가 진행되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창립을 선포하는 '민중민주운동선언'은 발기인을 대표해 이부영이 낭독했다. "그동안 사회 각계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보장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과 민중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온 우리들 민주, 민중 운동단체 대표"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란 바로 이전과 같이 사회적 명망이 있는 개인들을 대표로 내세우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 명성은 적더라도 각 부분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운동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민민협의 대표위원은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세 사람이 맡았는데, 김승훈과 김동완은 성직자였으므로 아무래도 대외활동에 소극적이어서 사실상의 대표 역할은 이부영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결성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근태는 서기를 맡아 출범 후에도 각 부문 간 협력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창립한 민민연은 민청련과 가까운 서울 종로 1가 서울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개설했고, 8·15민족해방기념식을 민청련 등과 함께 치러냈다. 그리고 10월에는 독자적인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창간했다.
명망가들 '민주통일국민회의'로 모이다민민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지만 그 활동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은 한계가 있었다. 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은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명망이 있는 성직자나 재야정치인이 주도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명망성이 있다는 것은 곧 사회적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민민협과 같이 명망성이 낮은, 조직 대표자들이 활동을 벌이다보니 이전의 운동에 비해 파급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렇게 명망성이 있는 운동가들이 민민협에서 제외됨으로써 그들이 가진 운동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였다. 물론 명망가들 자신도 운동에 기여할 기회를 갖기 원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재야정치인 계훈제, 백기완 등이었다.
결국 이들은 각 개인이 참여하는 운동단체를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1984년 10월 16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 발기인 50여 명이 모였다. '민주통일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발족시키는 자리였다.
조직의 성격을 보면, 국민회의는 민민협과 판이하게 달랐다. 조직의 대표자가 아닌 전국적 단위에서 국민적 명망성을 가진 성직자, 지식인, 예술인 등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해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기본조직이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와 분과위원회를 두어 실행과 연구를 병행하는 구조를 취했다. 집행위원회가 사실상 대표기구가 됐는데, 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 신현봉, 사무총장 이창복으로 구성됐다.
민청련은 국민회의의 창립을 표면적으로는 축하했지만, 내부적으로 이 단체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보내는 분위기가 강했다. 민청련이 자신의 청년운동론에서 '조직운동' 노선을 주장한 것은 바로 6,70년대 명망가 위주의 운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회의가 과거와 같은 명망가 운동이 되고, 결국 운동이 쟁취해낸 정치적 성과가 오로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상황이 올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청련의 우려는 국민회의 창립 며칠 뒤 있었던 민청련 3차 총회에서 채택한 '민주통일국민회의 발족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에 그대로 드러났다. 즉 성명서에서 "역사발전에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의지는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소박한 진리가 우리를 지탱하는 정신적 근원일 때, 우리는 민중의 의지를 어떻게 조직하며 어떻게 현실의 불합리를 투쟁 속에서 타개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직과 연대 속에서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국민회의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조직이냐 명망성이냐, 통합론 대두국민회의 구성원들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국민회의는 창립 3개월이 지난 1985년 2월 기관지 [민주·통일]을 창간했다. [민주·통일]은 1백 쪽 가까운 두께에 표지는 컬러로 인쇄됐고, 제대로 제본이 된 책자의 형태로 발간됐다. 가격도 1500원의 유료로 책정됐고, 책 뒤표지에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광고도 실려 있었다.
창간호의 특집은 '민족통일을 위하여'로 잡아서 당시 운동 세력이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 않던 통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그런데 더욱 눈에 띠는 글은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창립 취지와 운동방향'이라는 기획기사였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적 시각에 대한 해명과 극복방안을 내놓은 글이었다.
글에서 국민회의는 현재로서는 비록 명망성 있는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각 부문운동의 활동은 자칫 국민 일반에게 조직 이기주의의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국민회의야말로 일반 국민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욕구를 대변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울러 국민회의는 현역 정치인의 참여를 금지하고 있으며, 집권을 겨냥하는 정당 차원의 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국민회의가 기존 정치권에 진출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글에서 국민회의는 '민중 노선'을 견지할 것이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위해 복무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민민협과 비록 조직노선은 다르지만 운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 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었다.
국민회의가 민민협과 협력하겠다는 운동노선을 밝혔지만, 그렇다면 두 단체가 별개로 운영할 필요 없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민청련의 시각은 조직운동 노선에 따라 건설된 민민협이 해소되는 것이 자칫 조직운동 노선을 포기하고 명망가 운동으로 흡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깊었다. 당시 운동 세력에서 비교적 강한 발언권을 갖고 있던 민청련의 입장이 이러했기 때문에 두 단체의 통합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두 단체의 통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강한 충격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85년 2·12 총선이었다.
(민청련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증언을 기다립니다. 채록된 증언은 [민청련사]를 책으로 발간할 때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