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건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남재준·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나섰다. 이 전 원장은 "박 전 대통령이 (특활비를) 당연히 국익을 위해 국정 수행에 사용할 것으로 신뢰했다"며 사실상 박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성창호)는 국고손실 등 혐의를 받는 두 전 원장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재판 쟁점과 증거 등을 정리하는 준비기일에는 피고인 출석 의무가 없어 이들 모두 이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 전 원장과 이 전 원장은 특활비를 전달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특활비 자체가 국정원이 청와대에 예산을 지원하는 목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과의 공모 관계도 부정했다.
남 전 원장 측은 "공소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원래 청와대를 목적으로 했던 특활비라고 생각해 안봉근 전 국정홍보비서관의 요구에 따라 (특활비를) 전달한 사실은 있지만,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이나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이 전 원장 또한 표현은 달리했으나 입장은 같았다. 이 전 원장 측은 "국민의 귀중한 세금에서 나온 특활비 8억 원을 세밀한 법적 검토를 미처 하지 못한 채 박 전 대통령에게 예산을 지원함으로써 (특활비를) 엄격히 지출하지 않은 점을 깊이 뉘우치고 국민에게 사과한다"면서도 "이 정도의 청와대 예산지원은 허용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전 원장의 변호인은 "(이 전 원장은) 국정원 차원에서 특활비를 (청와대에) 지급하면 이를 박 전 대통령이 당연히 국가와 국익을 위해 사용할 거라 신뢰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남 전 원장은 6억 원, 이 전 원장은 8억 원을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로 제공해 국고 손실을 입혔다고 보고 있다. 또한,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전달하는 과정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청와대에 파견 중인 직원 접견을 명목으로 하거나 이 전 비서관이나 안 전 비서관의 차량을 이용하는 등으로 특활비를 전달했다.
앞서 특활비 상납 협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 전 비서관과 안 전 비서관은 지난 19일 열린 첫 공판에서 "박 전 대통령이 '국정원에서 봉투가 넘어오니 받아두라'는 지시를 했다"며 박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한 바 있다. (관련 기사:
이재만·안봉근 "박 전 대통령 지시로 국정원 특활비 받았다")
특활비를 두고 이를 전달한 두 국정원장과 전달 과정에 참여한 '문고리'들이 박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박 전 대통령은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검찰은 오는 22일 국정원 특활비와 관련해 오는 22일 박 전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공판에서 "이헌수 전 실장을 곧 기소할 예정"이라며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 1억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과 관련해 "공여자로 이 전 원장도 내년 1월 초순 무렵 추가 기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이 전 원장과 남 전 원장의 다음 공판준비기일을 오는 1월 22일에 진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