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 어른들끼리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일들을 겪습니다. 오직 육아하는 이 때만, 부딪칠 수 있습니다. 애 키우는 동안 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좌절감에 글을 씁니다. '너희만 크냐? 엄마도 같이 크자'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육아일상 속 메세지를 담아 글을 씁니다. - 기자말막 4개월에 접어든 둘째에게 눈빛이 생겼다.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누워만 있다가 드디어 자기 존재를 눈맞춤으로 표현한다. 거기에 보드랍고 말랑한 두 손을 꽉 쥐고, 힘껏 고개를 가누면 때묻지 않은 사랑스러움에 팔불출 엄마는 난리법석을 떤다.
"아이고, 어디서 이런 귀염둥이가 왔을까. 우리 귀염둥이. 이쁘다. 까꿍!"엄마는 촐싹대며 사랑공세를 퍼붓는다. 눈치 없이 어린 둘째만 이뻐했던 탓인지, 스티커 붙이며 잘 놀던 첫째가 울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귀염둥이야! 내가!"도통 샘을 내지 않아 괜찮을 줄 알았다. 흔하다는 해코지 한 번 없이, 늘 자기 놀이에 열중하던 큰 아이였다. 그러다가 '귀염둥이'의 왕관을 동생에게도 씌우자마자 그동안 누려왔던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기'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안달이 난 거다.
큰 아이 생의 첫 비교, 누가 누가 더 귀엽나로 시작됐다. 허나 누가 더 귀엽고, 덜 귀여울까. 적어도 부모에게 둘 다 세젤귀(세상에서 제일 귀여움)인데, 뭣하러 저리 샘을 낼까 싶었다. 별일 아니라 여겼다.
하지만 큰 아이는 본격적으로 동생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하면 자기 거라며 가져갔다. 딸랑이를 흔들어주면 그걸 뺏어가기도 했다. 이젠 동생 바운서를 차지해 누워 있을 대도 있다. 대체 '더' 귀여운 게 뭐라고 저러나 싶었다.
부모 품을 차지하려는 소리없는 전쟁통에서 벗어난 새벽만이 내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을 펴놓고 읽다가 견딜 수 없이 부러워졌다. 은유 작가는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단골 카페 창가 자리에서 하늘 보며 글을 쓴다고 했다.
전투 육아의 틈바구니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아침에 부랴부랴 큰 아이 어린이집에 보낸 후, 작은 아이를 포대기로 안아 재울 때만 유일하게 편히 글 쓸 수 있다. 행여 밝으면 선잠을 잘까봐 블라인드를 치고, 앉아서 작업하면 깰까봐 책장 위 빈 곳에 노트북을 두고 선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취미생활을 즐기고 나면 다리와 허리가 뻐근하다.
나도 은유 작가처럼 경치 좋은 카페에 앉아 향 좋은 카푸치노를 두터운 머그잔에 담아놓고 나의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생각은 내가 나를 존중하고, 귀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는 거야. 내 주관이 서면 비교하는 마음도 없어져.
- <엄마의 주례사> 중"잘 살아가다가도 남과 비교하는 순간 다리 힘이 풀려버린다. 큰 아이도 그랬나보다. 내가 은유 작가의 '하늘과 커피 있는 카페'를 '어두운 작은 방 책장 위'와 비교한 후 불행하다 느낀 것처럼 말이다.
애 키우면서 글 쓸 수 있는 방법 찾았다며 기뻐하던 그 순간을 잊고 있었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글쓰는 즐거움을 누리고, 은유 작가는 은유 작가 대로 지난한 글쓰기의 돌파구를 찾았을 뿐이다.
큰 아이가 어서 백전백패일 뿐인 비교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튼튼한 자존감으로 자기 세계를 살면 좋겠다. 세 살 배기 큰 아이 입에서 '나도 귀염둥이야'가 터져나오려면 부모도 사랑 한 움큼 더 쥐어줘야 함도 잊지 않는다. 부모가 유아기 때 사랑을 두텁게 줄 때, 아이는 자존감을 더 견고하게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유아기를 지나쳐버린 나는 가만히 서서 기쁜 마음으로 중얼거려본다. 오늘도 아이 잘 재우며 글 쓸 수 있어 즐거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