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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이 누군가에게 잘해준 내용은 기억하고 있는데 불리한 내용은 기억을 안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피해자들이 아픈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를 피고인이 쥐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구속되어 있는 동안) 그 무엇을 기억해 냈으면 좋겠습니다."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19단독(판사 이성은)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피고인 신문 도중 증인으로 출석했던 전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 고병천(79)씨가 법정 구속되었다.

고씨의 구속은 1970년대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사건의 재심재판 당시 재판부에 출석해 증인하던 중 "고문한 적이 없다"고 진술해 위증혐의로 기소가 되어 이뤄진 것이다.

"잘못했습니다. 재판부에 죄송합니다. 윤정헌씨에게도 죄송합니다."

고씨는 당초 변호인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재판부에 선처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으나, 정작 피고인 신문과정에서는 당시 고문 상황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며 구체적 진술을 피하면서 피해자들의 공분을 샀다.

특히 재판부와 피해자에게 사과했던 고씨는 윤정헌·이종수씨 등 조작 간첩 피해자에게 고문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김정사·김병진씨 등 다른 피해자를 고문한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고문 행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왜 고문했느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고,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무엇을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못하는 고 씨의 태도를 진정한 사과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재판부는 5분간 휴정을 선언하였고, 그 뒤 담당 판사가 자리를 비우자, 피해자들의 억울,한 목소리가 법정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네가 나를 고문한 사실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도 보안대 놈들만 생각하면 내가 눈물이 나."

고문수사관이 사과한다는 말에 아침 일찍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재일교포 피해자들은 이번 재판만 무사히 넘기길 바라는 고씨의 거짓 사과에 분노와 눈물을 보였다. 5분 동안 휴정을 끝내고 다시 법정에 들어선 재판부의 얼굴에서는 비장한 표정이 가득했다. 결국, 재판부는 합리적 다툼을 위한 조처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판사는 고씨를 향해 또박또박 발언을 이어갔다.

"이 재판은 비록 위증 혐의를 다투는 판결이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위증 혐의가 아닙니다. 피고인은 본인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고, 불리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고인에게도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피고인은 기억해내야 합니다.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피고인은 적어도 재판 끝까지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증거는 피고인 자신입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대답하지 못하는 피고인에게 재판부는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며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이 결정에 고씨로부터 고문 피해를 받은 피해자들의 눈물과 환호가 이어졌다. 그들에게 이제야 조금 사법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고병천 구속 뒤 법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조작간첩 피해자
 고병천 구속 뒤 법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조작간첩 피해자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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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는 구속되어 있는 동안 진정한 사과는 재판부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고문하고 간첩으로 조작해서 수십 년간 억울한 세월을 살았던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사과하는 것이 제대로 된 사과이다. 재판부의 이야기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으로 사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 다음 재판은 4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지방법원 501호에서 열린다.


#지금여기에#윤정헌 사건#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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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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