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문제에 주변국들이 어떻게든 끼어들려 하고 있다. 미국은 처음부터 자리를 잡았고, 중국은 남·북·미가 아닌 남·북·미·중 4자 구도로 만들려 하고, 러시아는 6자회담 때처럼 테이블에 앉고 싶어 하고, 일본은 납치 문제라는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끼어들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도 이 정도니, 앞으로 통일이 본격화될 때는 이들이 얼마나 더 적극적으로 간섭하려 들지 짐작할 수 있다.
1990년 독일 통일 때도 그랬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에다가 유럽 정상급 강대국이었기에, 주변국들의 견제가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동서독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붕괴될 때만 해도 주변국들은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그러다 막상 독일이 통일되려 하자, 감추어둔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독일 통일에 간섭한 주변국들
2차 대전 뒤에 독일을 분단시킨 국가들은 4대 전승국인 미국·소련·영국·프랑스다. 이 중에서 소련(러시아)은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보다는 전승국의 협의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서독이 동등권을 요구하는 상황까지 있었다. 2007년에 전 동독 국방장관 라이너 에필만이 연세대 통일연구원의 <통일연구> 제11권 제1호에 기고한 '독일 통일의 외교 및 안보정치적 전제조건들'에 이런 대목이 있다.
"독일의 미래에 관한 결정을 위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를 확정 지으려 했던 1945년 포츠담 회의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소련은 이미 일찍부터 4대 전승국의 회동을 요구했다."2차 대전 막바지에 일본 처리문제를 논의했던 포츠담 회담 때처럼, 소련은 독일 통일 문제를 일차적으로 4대국 회의에서 논의하려 했다. 소련은 서독이 주도할 게 뻔한 독일 통일이 완료되면, 통일 독일 군대가 소련 쪽인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아니라 미국 쪽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로 인해 동유럽 군사동맹체인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약해지면 이 지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이 쇠퇴할 거라는 생각에서, 소련은 독일 통일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4대국을 위에 놓고 동서독을 아래에 놓는 구조 하에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독은 '통일은 우리 문제'라며 항변하지 않으면 안 됐다. 동서독을 대등하게 끼워달라고 도리어 호소해야 했던 것이다.
"서독 정부는 그런 방식에 철저하게 반대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독일이 단순한 협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동등한 권리를 지닌 파트너로서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이 같은 항의에 따라 열린 게 동서독과 미·소·영·프의 '2+4 회담'이다. 독일 같은 강대국도 주변국들의 개입과 간섭에 대해 이 정도로 신경을 써야 했다.
미국은 '독일이 하나가 되더라도 미국보다는 강해지지 않을 것이며, 통일 독일 군대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한다면 미국의 영향력이 전 유럽에 확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독일 통일을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달랐다. 소련만 견제했던 게 아니다. 소련 외의 국가들도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10년에 독일 하겐대학의 알렉산더 폰 플라토 교수가 한국독일사학회의 <독일연구> 제20호에 기고한 '독일의 통일-유럽을 둘러싼 국제적 권력게임'에서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대처를 수반으로 하는 영국 정부는 독일 통일 가능성에 대하여, 통일될 경우 고르바초프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논지를 제시하면서 강력한 방어 자세를 취하였다."동독이 서독에 흡수돼 소련의 위상이 약해지면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공산권 개혁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게 영국의 논리였다. 공산권 개혁의 가속화를 위해서는 독일이 통일되지 말아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 통일을 반대한 이유는 더 있었다. 독일 통일로 세력 구도가 바뀌면 영국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으며, 잘못하다가는 동맹국 미국과의 파트너십을 독일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도 갖고 있었다. 라이너 에필만의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통일 독일이 변화된 틀 안에서 혹시 외교무대에서 주목을 받는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와, 유럽 내에서 새로운 미국의 주요 파트너로 부상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한편, 프랑스는 자국이 주도하는 유럽 통합이 독일 통일 때문에 위태해지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 거기다가 1871년 독일 통일 때 프랑스가 제물이 됐던 악몽도 작용했다. 독일제국 재상 비스마르크는 통일의 장애물인 오스트리아(1866년) 및 프랑스(1870년)를 전쟁으로 제압한 뒤 통일을 완성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독일 통일에 대해 부정적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승국 4대국만 통일 문제에 개입한 게 아니었다. 독일 통일이 2+4로 진행되자 여기에 끼지 못한 유럽 국가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왜 우리를 배제하느냐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폰 플라토 교수의 논문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배제에 관하여 특히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외무부 장관이 격분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이 문제는 네 개의 승전국들과 두 독일 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유럽인들의 문제라는 것이다."독일 통일은 전 유럽의 문제이므로 자기네도 개입해야 한다는 게 이탈리아·네덜란드의 주장이었다. '특히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라는 표현에서, 그 외의 유럽 국가들도 개입하고 싶어 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에 대해,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은 "여러분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습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그냥 관전만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독일을 둘러싼 강대국들은 단순히 회담 테이블에 앉고만 싶었던 게 아니다. 그들은 독일인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일례로, 소련은 통일 독일의 군대 규모까지 간섭했다. 1990년 7월 고르바초프의 고향인 코카서스에서 열린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고르바초프의 회담에서 그랬다. 콜의 회고록 <나는 독일 통일을 원했다>는 그 상황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처음엔 오해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고르바초프는 35만을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고르바초프는 통일 독일이 35만이라는 적은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콜이 '흥정'에 들어갔다. 흥정의 결과로 군대 규모가 얼마나 늘었는지, 콜의 회고를 계속 들어보자.
"우리가 제안한 병력 감축은 현대 국가로서 그 어느 나라도 이행한 적이 없는 가장 규모가 큰 군축 조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고르바초프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37만으로 합시다'."고르바초프가 인심 좀 써준 결과로 35만에서 2만이 추가됐다. 서독은 핵무기는 없지만 경제 강대국이었다. 미·소보다는 못해도 영국·프랑스와는 필적할 만했다. 그런 나라도 이처럼 외세의 간섭을 받으며 통일을 해야 했다. 군사력으로 통일을 했다면 이런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평화적으로 통일을 하려다 보니 주변국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핵화 명분으로 끼어든다면...
독일은 2차 대전 전범국인 데 비해 남북한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독일 통일에 비해 한민족 통일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훼방할 명분이 별로 없다. 하지만 북한 비핵화를 명분으로 국제사회가 끼어든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나라들의 참견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
비핵화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반도 통일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변동을 초래할 만한 사안이므로, 주변국들은 어떻게든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통일 문제를 끌고 가려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통일 코리아의 군대 숫자뿐만 아니라 어쩌면 예비군 숫자에까지 개입하려 할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미·중·러·일 외의 국가들까지 끼어들려 할 수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나라가 의자를 갖고 와서 회담 테이블에 앉으려 할 수도 있다. "여러분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구경만 하십시오"라며 그들을 진정시켜야 할 수도 있다. 종전선언에 이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통일 과정이 본격화되면,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각축전이 독일 통일 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